아마추어 전성시대

2020.11.24 03:00

일에 빠져 살던 예전의 직장인과 달리 요즘 사람들은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워라밸’을 중요하게 여긴다. 여행이나 독서를 넘어서 취미도 다양해졌고 동호회도 많다. 춤바람이 불어서 춤을 배우러 다니거나 중년의 나이에 생전 처음 악기를 배우는 사람도 꽤 있다. 독서가 취미인 사람들을 위해 주제별로 책을 큐레이팅해주고 동호인을 모아서 연결해주는 스타트업 기업도 출현했다. 이런 전문 독서클럽에 가입한 사람들은 틈날 때 책을 골라 읽는 정도가 아니라 주제별로 함께 읽고 주제 관련 전문가를 초빙해서 토론을 벌인다.

박형주 아주대 총장

박형주 아주대 총장

취미로 노래를 하고 곡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도 많다. 전문가 뺨치는 수준의 아마추어 작곡가나 화가는 자신의 작품을 전문가에게 보내서 평을 받고 싶어하고, 어느 경지에 이르면 아예 본업을 접고 프로의 세계에 뛰어드는 경우도 있다. 이들을 발굴해서 프로의 세계에 입문시켜주는 탤런트 발굴 프로그램도 출현해서 아마추어의 등용문 역할을 하며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한다.

과학을 취미로 하는 사람은 과학 분야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발견을 귀담아듣고 과학 강연에도 참석한다. 그래서일까. 요즘엔 이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대중적인 과학 강연도 자주 열린다. 시즌별로 주제를 정해 과학 대중강연을 개최하는 곳에서는 거의 모든 회차에 예약이 차고, 온라인 생중계에 수만명이 동시 접속하는 일도 자주 있다.

영화 <무한대를 본 남자>의 주인공 라마누잔은 실존했던 아마추어 수학자다. 인도에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서무 일을 하면서도 틈이 날 때마다 어렵다는 수학 문제를 풀어 자신의 노트에 적어 나가는 게 유일한 낙이다. 딱히 전문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데 어느새 노트 수십 권을 가득 채운 그는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에게 자신의 작품 중에 가장 빛나는 것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혹시 아는가. 자신의 작품에 탄복한 프로 수학자가 자신을 후원해줄지.

당시 영국 식민지이던 인도의 가난한 청년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수학 교수인 하디에게 편지와 함께 자신의 최고 작품을 보낸다. 애지중지하던 방대한 노트에서 그가 골라 보낸 건 무엇이었을까? 답은 ‘소수 정리(prime number theorem)’다. ‘이걸 보면 분명 감동할 거야’라고 라마누잔이 확신했던 그 수학 정리. 영화에선 ‘바로 그’ 정리가 얼마나 빛나는 작품인지를 설명하는 여러 장면이 나온다. 대부분의 영화 관람자가 ‘뭔 소리지?’하며 놓치고 넘어가는 장면이다. 도대체 그게 얼마나 대단하길래 당대의 천재들이 모여있던 케임브리지에서 일약 충격파를 만들고, 먼 인도 땅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젊은이를 초청하게 됐을까?

2, 3, 5, 7, 11처럼 자연수 중에서 1과 자신으로만 나누어지는 숫자가 소수다. 소수의 분포는 규칙 없이 제멋대로인 듯하다. 어떤 때는 붙어 있다가 어떤 때는 붕 떠서 한참을 가야 다음 소수가 나온다. 숫자가 커지다 보면 점점 희귀해진다. 고대 그리스에서 소수는 무한히 많다는 걸 이미 증명했었으니, 큰 소수를 잡고 한참을 가다 보면 분명 다음은 있다.

제멋대로인 듯한 소수의 분포에 어떤 규칙성이 숨어있고 로그 함수를 이용해서 그 규칙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소수 정리다. 교육받지 못한 아마추어 수학자가 신기루 같던 그 규칙성을 발견해서 케임브리지의 석학에게 보낸 것이다. 영화에서, 직관에 의지한 라마누잔의 결과를 현대 수학의 언어로 증명한 건 순전히 하디의 공으로 표현된다. 모든 아이디어는 오로지 라마누잔의 것이라며 공저자가 되는 걸 고사한 하디의 학자적 결벽증으로, 라마누잔은 자신의 이름으로 인생 첫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바야흐로 아마추어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라마누잔과 하디처럼, 아마추어가 프로와 만나면 세상을 뒤집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