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값을 수정하라

2020.11.16 03:00 입력 2020.11.16 03:04 수정

기업에 성평등 강연을 가면 성차별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높은 분들을 만난다. 요즘 남성들이 얼마나 고단한지 설명하겠다는 분들의 주장은 이렇다. 예전처럼 여성들에게 농담도 함부로 못한다. 신체접촉은 상상불가, 회식 때 술 한 잔 받는 것도 노심초사란다. 세상이 달라져서 남자들이 신경 쓸 게 많아졌고 그래서 더 힘들다면서 흥분한다.

오찬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오찬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것인데, ‘그래도 괜찮은 세상’에 길들여지면 기존과 달라지는 상황들이 어색하고 불편하다. 오랫동안 기업문화는 음담패설도 허용되었고 신체접촉을 친밀감의 표시로 (당하는 쪽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노래방에서 상사와 블루스를 추고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여성들에게만 사회생활 잘한다는 수식어를 붙였고 반대의 경우는 뒤끝 있는, 그래서 믿고 일을 맡겨서는 안 될 인간으로 취급했다. 남성과 여성이 부여받는 역할도 성별 고정관념에 따라 철저히 달랐다. 남성을 야수처럼 부리면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이었고 여성을 직장의 꽃, 딱 여기까지만 인정하고 조직을 관리하면 효율성이 좋은 사례로 인정받았다. 야수가 꽃 따위를 신경 쓰겠는가. 조직의 기본값에 여성은 없었다.

불평등이란 기본값의 불균형을 말하며, 평등은 기본값을 수정해야 가능하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태초의 질서처럼 여겼던 사람들의 일상이 그대로 유지된 채 차별이 사라질 리 없다. 평소처럼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건 누구의 자유를 훼손하는 역차별이 아니라, 누구의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시민의식이다. (우리 다함께 ‘남자라면 강해야지!’라는 그 빌어먹을 관념에도 저항하자!)

차별금지법이 우여곡절 끝에 공론장에 등장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표류 중이다. 아쉬운 이들은 한 명이라도 설득시키고자 친절한 설명들을 마다하지 않는다. ‘성소수자를 싫어한다고 말만 해도 처벌 받는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니 걱정 말라면서 약자를 보호하려는 취지를 이해해달라고 읍소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인간의 기본값을 이성애자로 설정했던 이들의 언어와 행동이 제약받지 않고 새로운 기본값이 등장할 리 없다. 동성애를 반대할 권리, 혐오할 자유가 유지된 채 차별이 사라질 수 있겠는가. 별다른 죄책감조차 없었던 일상이 변화되는 걸 자유의 침해로 해석하는 관성을 깨지 않곤 변화는 요원하다.

몇 년 전에 한 서점에서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는 경사로 보철을 설치했는데 통행에 방해되니 철거하라고 민원을 넣은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의 권리가 찾아지는 과정을 역차별로 받아들이는 건 비장애인만을 기본값으로 설정한 기존의 도로를 자연의 질서로 여겨서일 게다. 잘못된 설계도를 뜯어고치는데 어찌 사람들의 어제가 오늘과 같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려고 이를 악물고 노력한다. 살을 빼고 근육을 키우고 체형을 바꾼다. 일상의 모든 기본값을 점검하고 개선한다. 평소에 먹던 음식을 ‘칼로리가 높은 음식이 몸에 들어오면 중성지방이 높아진다’면서 자제한다. 보통 때와는 다르게 ‘고통을 참으면서’ 운동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했던 말과 행동이 차별로 이어질 거라는 성찰 없이, 그릇된 습관을 전복시키는 실천 없이 결과가 달라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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