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사람의 진짜 책무

2020.11.14 03:00 입력 2020.11.14 03:02 수정

‘사연 팔이’. 주로 오디션 프로그램 시청 소감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다. 자신(과 가족)의 경험을 앞세우는 경우를 일컫는데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즉, 음악 오디션인데 불행했던 가정사를 필요 이상으로 부각해 연민을 자극할 경우 여지없이 ‘사연 팔이’라는 비판이 따라붙는다. 인간이란 본디 남의 이야기, 즉 ‘드라마’를 좋아하기에 그런 사연은 묘한 중독성이 있어 대중에게 어필한다. 그래서 과한 양념과 연출이 섞이는 경우가 많은데 조미료도 지나치면 음식에 방해가 되기 마련이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오수경 자유기고가

글을 쓰는 일도 ‘사연 팔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어떤 이슈에 관해 쓸 때 나와 내 주변인들의 경험은 그 이슈를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마중물’이 된다. 그래서 글 쓰는 이들에게는 크든 작든 ‘사연 팔이’ 욕망이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의 경험은 물론이고, 가족이나 친구의 경험 중 마중물이 될 법한 이야기는 ‘글감 주머니’에 담아두었다가 어느 글에 슬쩍 얹어놓곤 한다. 드라마 <산후조리원>에 관한 글을 쓸 때는 지인들의 출산·산후조리원 경험담을 마중물로 사용했다. 가재를 키우는 지인에게서 들은 ‘가재는 죽을 때까지 탈피를 해야 살 수 있다’는 말은 언젠가 써먹으려고 허락을 받아두었다. 공공장소에서 마주하는 상황이나 타인들의 대화도 훌륭한 마중물이 된다.

그럴 때 고민이 생긴다. 나 혹은 타인의 경험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필요 이상으로 압도하지는 않는지, 연민의 덫에 빠져 과하게 양념 치거나 포장하여 본질을 왜곡하지는 않는지, 나의 지식과 옳음을 빛내기 위해 타인의 불행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신문에 쓰는 칼럼은 물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쓴 낙서 같은 글조차도 나의 ‘얼굴’이 된다. 어느 때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에 번들거리는 얼굴이었다가, 또 어느 때는 자신의 경험에 갇혀 완고한 얼굴이 된다. 얼굴을 가진 이에게는 외출할 때 깨끗하게 씻고, 단장해야 하는 책무가 있다. 마찬가지로 ‘나쁜 글을 쓰겠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글 쓰는 이들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부지런히 ‘거울’을 닦고 먼저 제 얼굴을 보아야 할 책무가 있다. 좋은 글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지만, 나쁜 글은 꼽을 수 있다. 누군가의 ‘사연’이 나를 돌아보고 확장하게 하는 동기가 되는 게 아니라 나(의 주장)를 위해 그의 경험을 함부로 희생시키고, 그의 삶에 무례를 범하는 글일 것이다. 며칠 전에는 ‘나쁜 글’을 보았다. ‘지식인의 진짜 책무’를 설파한 그 글이 누구에게 겨눈 칼날인지 모르겠으나, 그 칼날이 애먼 그의 어머니의 삶에 무례를 범했고, 가정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한 여지를 주었다.

그 글이 며칠째 내 머릿속을 맴돈다. 필자의 모자란 마음을 비난하기에 앞서 내 글이 행여 그와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꾸 돌아보게 된다. 갈고닦은 실력으로 승부하기보다는 쉬운 ‘사연 팔이’의 덫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그러느라 내가 놓친 것은 무엇인지. 그 글이 나의 ‘거울’이 되었다. 다행히 해당 언론사와 필자가 글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게재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되었지만, 그가 어머니를 만나 진실되게 사과하는 게 지식인의 진짜 책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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