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노인 소외’

2020.12.14 03:00 입력 2020.12.14 03:03 수정

원인이 분명한 바이러스로 전 세계 160만명이 단 1년 만에 사망했다. 10년간 16만명이 죽어도, 명확한 이유를 알고도 모른 체하는 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좀처럼 터널의 끝이 안 보이는 이유는, 그러니까 방역의 효과가 미미한 건 160만명의 죽음보다 확진자의 98%는 죽지 않는다는 통계에 더 의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거다(치사율: 영국 3.5%, 미국 1.9%, 한국 1.4%). 그리고 이들은 2%의 위험성을 다음 정보와 결합시켜 0.2% 수준보다 더 낮은 수치로 받아들인다. 주로 ‘노인이’ 죽는다는 사실 말이다.

오찬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오찬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코로나 바이러스는 기저질환이 있는 60대 이상들에게 상당히 위험하다”는 분명하고도 끔찍한 사실이 건강한 개인들 일부(라고 믿고 싶다)에겐 별 무게감이 없다. 그러니 내가 조심하지 않으면 어떤 노인이 죽을 수도 있다고 해석하지 않고 ‘건강한 사람들끼리는 괜찮아’라면서 타인과의 접촉을 전문가들이 기대하는 수준으로 줄이지 않는다.

위험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명확한데도, 조심하지 않는 건 그 누구들이 언제나 소외받았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늙음’은 추한 취급을 받고 있다. 쭈글쭈글하기에 노인인데 이들은 ‘쭈글쭈글하다고’ 구석진 곳으로 밀려난다. 노화를 ‘방지하다’라는 표현과 엮는 게 일상적이고 ‘안티에이징’이라는 초자연적 단어가 돌아다니는 곳에선, 나이 듦을 거스를 때만 곱게 늙었다며 인정받는다. 무슨 수로 그게 가능하냐 싶지만 서점엔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 비법을 담은 책들이 즐비하다. 모두가 건강에 집착할수록,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민폐가 된다. 자기 관리라는 말이 보편화되면서, 늙어가기에 아플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젊을 때 몸을 돌보지 않았다’는 식의 말을 뱉어야 하는 압박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는 잠잠해졌으니, 독감 백신 음모론을 다시 짚어보자. 전문가들은 답답해했지만, 유독 올해가 더 소란스러웠던 걸 단순히 과학을 믿지 않는 풍토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이미 10개월 넘게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노인들의 공포심은 극에 다다른 상태였고 이는 가짜 뉴스에 혹할 수 있는 좋은 연료였다. 코로나19 때문에 자식들까지 전전긍긍하는 판국에 어찌 ‘늙어서까지’ 부담을 줄 수 있느냐는 철저한 방어심리가 없었다면 소동은 이 정도까진 아니었을 거다.

디지털에 익숙함을 전제로 구현되는 언택트 세상은 노인들에겐 공상과학소설을 마주하는 느낌일 게다. 주된 일자리에선 오래전에 퇴출당해 육체를 사용하지 않고선 생계유지가 불가능한 그들에게 재택근무라는 말은 판타지 소설일 뿐이다. 바이러스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가장 위험하게 살고 있다. 노인이라서 죽을 수 있다는데, 노인이 아니면 안 죽는다고 말하며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한국에서의 코로나19 확진자 중 70대 이상은 12%에 불과하지만, 사망자의 82.7%가 70대 이상이다(12월12일 기준). 여기저기 아파도 약 먹고 병원 다니면서 10여년은 더 살 사람들이었다. 대통령 선거도 몇 번이나 더 했을 노인 500여명이 전혀 예측하지 않은 일로 생을 마감했다. 이 사회가 노인들을 지금 죽어도 되는 사람처럼 대하진 않았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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