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에서 하는 백일몽

2020.12.23 03:00 입력 2020.12.23 03:03 수정

[노명우의 여행으로 쓴다]방구석에서 하는 백일몽

칼럼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여행 부재의 시간이 이렇게 길어지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여행을 못하게 되자 카페에서 여행 책을 읽는 것으로 부재하는 여행으로 인한 결핍의 감정을 달래곤 했다. 거리 두기 2.5단계가 선포되면서 카페에서 책으로 여행하는 것도 불가능해졌고, 어쩔 수 없이 방구석 여행을 시작했다. 방구석 여행을 하면 할수록 방구석 여행만의 의외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실제 여행에서는 경제적 사정 혹은 시간 제약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많다. 방구석 여행은 그럴 필요가 없다. 방구석 여행은 여행을 가로막는 현실의 제한 앞에서 비참하게 무릎 꿇지 않아도 된다. 굴복당하지 않은 계획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충분히 예술적이다. 상상하는 여행 계획은 더 장대해도 되겠다는 생각에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다뉴브>를 읽었다.

방구석에서 하는 백일몽-여행은 부재하는 여행이다. 기왕이면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에 부재하는 것으로 가득 찬 그 어딘가로 가자고 결심했는데 다뉴브강 일대는 방구석 여행지로 제격이었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는 국적을 기준으로 삼으면 이탈리아 사람이지만 독일 문학 전공이다. 그는 트리에스테에서 태어났다. 트리에스테는 1857년부터 1918년까지는 이탈리아가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항구도시였다. 지리적으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와 가까운 도시답게 주민 구성도 복잡하여 이탈리아어를 쓰는 사람, 슬로베니아어를 쓰는 사람, 크로아티아어를 쓰는 사람, 독일어를 쓰는 사람이 섞여 산다. 트리에스테는 한국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이례적 도시이다.

트리에스테 출신 마그리스는 다뉴브를 따라 여행한다. 방구석에서 그를 따라 여행했다. 북해로 흘러가는 라인강이 게르만이라는 단일 정체성을 표상한다면 다뉴브는 게르만 제국과 논쟁적으로 대립하는 게르만-마자르-슬라브-로망스-유대라는 민족을 아우르는 세계다. 흑해까지 흘러가는 강은 하나인데, 그 강을 부르는 이름은 제각각이다. 그 강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선 도나우, 슬로바키아에선 두나이, 헝가리에선 두너, 크로아티아에선 두나브, 불가리아에선 두나프, 루마니아에선 두너레, 우크라이나에선 두나이라 부른다. 다뉴브가 빈을 흐를 때는 그래도 익숙한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흑해로 강이 흘러갈수록 점점 낯선 세계가 펼쳐진다. 진짜 여행보다 더 흥분된다. 여행의 참맛은 본래 낯선 것과의 만남 아니던가.

순수한 혈통을 고수하는 전설로 충만한 라인강과 달리 다뉴브는 여러 민족이 서로 교차하고 섞이며 빈, 브라티슬라바,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다키아를 지나간다. 다뉴브를 따라 상상적으로 여행하다보면 ‘5000년 단일민족의 유구한 역사’라는 관점에선 상상할 수 없던 기묘한 교차적·다원적·혼종적인 세계와 마주친다.

다뉴브 일대를 상상적으로 여행한 후 마그리스의 책에서 여행을 마무리하기 적당한 곳을 찾아냈다. 마그리스가 트리에스테에 있는 카페 산마르코에 대해 쓴 글이 그의 책 <작은 우주들>에 실려 있는데, 그 카페는 부재하는 곳을 찾아 떠나는 방구석 여행의 상상력을 한없이 자극한다. 그는 “우선권도 없고 배제도 없이,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는 노아의 방주”이자 “밖에 세찬 비가 내릴 때 피신처를 찾는 연인을 위한 자리도 있고 짝을 잃은 사람을 위한 자리도 있는” 산마르코 카페에서 벌어지는 일을 만화경으로 묘사했다.

그는 카페 산마르코를 “사이비 카페”가 아닌 “진정한 카페”라 했다. “착한 신사든, 멋진 희망을 품은 젊은이든, 대안적 집단이든, 아니면 현대적 지성이든, 단일한 무리가 진 치고 있는 곳이라면 사이비 카페일 뿐이다. 모든 동족 결혼은 숨 막히게 한다. 전문학교, 대학 캠퍼스, 회원제 클럽, 조정사 집단, 정치적 회합, 문화 토론회 등은 바다의 항구 같은 삶에 대한 부정이다.” “바다의 항구 같은 삶이 부정”당하지 않는 곳은 내가 몽상에 빠져 있는 방구석이 있는 여기 한국에선 어디에 있을까? 2020년의 끝자락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며 여행할 수 없는 시대에 써야 했던 기괴한 칼럼 ‘여행으로 쓴다’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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