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2021.03.31 03:00 입력 2021.03.31 03:01 수정

[강준만의 화이부동]문재인 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어떤 사람에게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머릿속으로 간다. 그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그의 마음으로 직행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세계적인 인권운동가였던 넬슨 만델라의 말이다. 그는 27년간 감옥살이를 하면서 자신을 가둔 남아프리카 태생 백인들의 문화와 역사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고, 그들이 좋아하는 럭비를 시청하고 그들의 언어를 배웠다. 이게 그가 비폭력운동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였다. 백인들과의 소통과 상호 신뢰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최근 번역·출간된 네덜란드 언론인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 감춰진 인간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만델라 부분에서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양극화된 증오의 정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한국은 야만적인 인종분리 정책을 펴는 나라가 아니다. 인종 갈등도 없고,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폭력 사태도 없다. 증오라고 해봐야 말과 글로 표현하는 수준이다. “갈등은 민주주의의 위대한 엔진”이라는 이유를 들면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치열하게 실천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치가 승자독식 전쟁을 벌이느라 민생이 도탄에 빠지게끔 하는 역할만 하고 있다는 데에 분노한다면 이 책을 통해 소통과 협치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을 해볼 수 있을 게다. 성선설을 역설하는 듯한 저자의 모든 주장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성악설의 신봉자일지라도 조금이나마 얻을 것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 “악이 더 강해 보이더라도 선의 숫자가 더 많다”는 점에서 말이다.

정치인들 가운데 마키아벨리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정치를 보라. 마키아벨리가 깜짝 놀랄 정도의 권모술수가 난무한다. 4·7 재·보궐 선거의 열기가 뜨거워져 가는 가운데 상대 후보에 대한 인신공격을 포함한 온갖 네거티브 공세가 난무한다. 선거라는 게 원래 그런 법이라고 생각하는 언론은 그런 네거티브 권모술수가 정치의 일용할 양식인 양 자연스럽게 보도한다. 그런 가운데 ‘증오의 정치’는 유권자들의 일상적 삶에까지 파고들어 정치권의 소통 불능을 악화시킨다.

승자독식 전쟁 속에 ‘증오의 정치’
재·보궐 선거서도 네거티브 공세
유권자 일상적 삶까지 파고들어
정치의 ‘소통 불능’을 악화시킨다

지지자를 감싸고 반대를 무시한
현 정부의 ‘정의로운 증오’ 발산
이러한 악순환 고리를 끊으려면
문 대통령 먼저 ‘소통의 결단’을

‘증오의 정치’라는 프레임에 갇힌 사람들은 반대편이 증오를 필요로 하는 대상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한 ‘악마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증오를 정당화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답해보자. 증오는 나에게 고통을 주는가, 쾌락을 주는가?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이, 분노는 고통을 동반하지만 증오는 고통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그라질 수 있지만 증오는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증오는 고통이 없기 때문에 사그라들 필요가 없을뿐더러 자신을 좀 더 우월한 존재로 여기게끔 만드는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엔 ‘증오 마케팅’을 하는 ‘증오 산업’이 번창하고 있다. 정치 산업과 이와 부족주의적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각종 하위 산업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온갖 명분으로 포장을 씌운 증오의 선동에 앞장서고 있다. 가수 안치환은 이미 ‘개새끼들’이란 노래에서 그 점을 탁월하게 간파했다. “절대 가친(가치는) 없어 절대 신념도 없어/ 니 밥그릇 앞에 내 밥그릇 앞에/ 영원한 사랑은 없어 영원한 증오도 없어/ 니 밥그릇 앞에 내 밥그릇 앞에.” 진짜 증오건, 가짜 증오건 증오가 밥그릇의 도구로 활용되는 게 우리의 현실임을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선진국들의 정치도 원래 그런 게 아니냐며 너무 호들갑을 떤다는 반론이 가능하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 우리가 미국이나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 더 선진적인 정치를 하면 안 되는가? 사회발전단계상 그건 불가능하다고 지레 포기하기 전에 꼭 해야만 할 절박한 사정이 우리에게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해보면 안 될까? 주변 강대국들이 강자의 횡포를 부리는 지정학적 조건, 그리고 만성적인 위협과 불안을 초래하는 남북분단 상황은 정치를 대하는 우리의 기본 자세에 변화를 요구하는 게 아닐까? 독재정권들이 그런 특수 상황을 독재의 명분으로 내건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스스로 새로운 정치의 실현을 위해 애써야 하지 않을까? 최근 출간된 <추월의 시대>라는 책 제목에 빗대 말하자면, ‘추격’이 아닌 ‘추월’의 가능성을 정치에서도 찾아보자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증오 정치의 희생자는 엘리트 계급이 아니다. 보통사람들이다. 사실 정치인들은 가끔 진짜 싸움을 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텔레비전 카메라나 기자 앞에서 싸우는 척하는 연기를 하고 있다. 사적인 자리에서의 화기애애한 만남을 통해 상대가 악마거나 악의 편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소통과 협치와 선의의 경쟁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문제는 늘 위에서 떨어지는 ‘오더’에 있다. 정당들은 의원들이 이런 오더에 따라 움직이는 게 정당정치의 본령이라고 주장하면서 오더를 따르지 않은 의원을 징계하거나 박해한다. 그런 오더를 내렸거나 다수의 의견으로 몰아간 권력자들의 판단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없다. 바로 여기서 자주 대통령이 문제가 된다.

문재인 대통령의 사전에 소통은 있을까?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과는 좀 다르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퇴근길에는 시장에 들러 마주치는 시민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때로는 광화문광장에서 대토론회를 열겠습니다”라고 했던 말은 사실상 농담이 되고 말았다. 그는 신년 기자회견에서 취임 후 기자회견 횟수가 적어 ‘불통’ 논란이 불거졌다는 기자의 질문에 이런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기자회견만이 국민과의 소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는 어느 대통령보다도 현장방문을 많이 했다.” 현장방문과 의전을 소통으로 착각하는 대통령에게 “그런 소통을 통해 도대체 무슨 갈등을 설명하거나 해소했느냐?”고 되물어야 하는 걸까?

나는 문 대통령이 이제 더 늦기 전에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열성 지지자들의 모든 행태를 감싸기만 하지 말고 간절한 자세로 그들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간의 노고에 감사하면서 이제 ‘정의로운 증오’의 발산을 중단하고, 겸손한 자세로 각자 선 자리에서 일상적 삶의 작은 민생개혁을 위해 애써 달라고 말이다. 열성 지지자들은 반대편이 상종할 수 없는 집단이라며 그들의 ‘죄악’을 낱낱이 열거하겠지만,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든 가장 큰 책임은 문 대통령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법이다. 그간 문 대통령은 적폐청산과 개혁을 앞세워 반대편을 철저히 무시하는 정치를 해왔다. 야당이 자꾸 발목을 잡기 때문이라지만, 늘 원인 제공은 문재인 정권이 해왔다. 최근 여론조사 등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민심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쌍방 간 증오를 증폭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권력을 더 가진 쪽의 결단이 필요하다. 국민 모두의 지도자라면 어느 현인의 말처럼 “우리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책임감으로 현명해진다”는 이치를 믿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착함과 정의로움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착하고 정의로운 구석이 조금이나마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외면해선 안 된다. 어느 언론인은 만델라의 성공 요인에 대해 “100명 중 99명이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라고 판단한 사람들에게서 좋은 면을 보기로 선택했다”는 설명을 내놓았는데, 누가 그렇게까지 하라고 요구하겠는가. 박근혜 탄핵과 문재인 정권의 출범이 60여명의 반대편 정당 의원들의 협력 덕분에 가능했다는 사실만이라도 상기해 보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나와 우리만 착하고 정의롭다는 독선과 오만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나는 지지자들에 대한 문 대통령의 호소가 받아들여져 실천되는 일이 벌어진다면, 이거야말로 문재인 정권의 모든 과오를 덮고도 남는 큰 업적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후 정치가 민생을 돌보는 걸 가장 중요시하는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소통과 화합을 부르짖었던 취임사를 다시 읽어보면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의 비전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문 대통령이 만델라와 같은 화합과 통합의 지도자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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