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혁신의 시대

2021.05.26 03:00 입력 2021.05.26 03:03 수정

여럿이 함께 이용하는 자원이 무분별한 남용으로 훼손되는 현상을 경제학자들은 공유지의 비극이라 부른다. 무분별한 어획으로 물고기의 씨가 마르는 현상, 공장 폐수로 강과 호수가 오염되는 현상, 남벌로 숲이 파괴되는 현상 등 무수히 많은 사례가 있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행동들이 모여, 자신은 물론 모두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20세기 글로벌 자본주의는 지구라는 공유지를 무대로 국가 간, 기업 간, 개인 간의 이기적 경쟁을 폭발적으로 확산시켰다. 지구 구석구석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여 단기적 이윤극대화에 눈먼 기업과 눈앞의 욕망 충족을 위해 폭식하는 소비자가 대량생산과 과잉소비의 악순환을 이어가는 위험한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공유지의 비극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끝을 말해준다. 실제로 오존층 파괴, 생물다양성 훼손, 기근으로 인한 식량 난민 등 수많은 환경과 생명 지속 가능성의 위기가 이어졌다.

국가 간 불평등은 확대되고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도 줄지 못해 글로벌 ‘국가계급’ 사회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극심한 양극화가 지속됐다. 지역갈등과 분쟁이 확대 재생산되는 글로벌 사회의 지속 가능성 위기도 계속됐다. 자본주의가 과연 인간진보의 가치를 높이는가에 심각한 회의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선진국의 과잉소비와 과잉투자 그리고 후진국의 빈곤과 저개발이 평행선을 달렸다.

지금 글로벌자본주의는 코로나19, 그리고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던 화석연료가 야기한 기후재난이라는 큰 위기에 봉착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100년 전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민들의 각성과 민주주의에 그 답이 있다. 신속한 백신개발과 기회평등한 공급을 목적으로 하는 코백스(COVAX) 사례처럼 글로벌 시민사회의 성찰, 국제적 연대 그리고 자본주의의 민주적 통제가 위기 탈출의 해법이 될 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로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전환은 서서히 진행돼왔다. 영국 에너지 기업 BP의 유조선이 일으킨 멕시코만 해양오염 사건, 나이키의 개발도상국 공장에서 벌어진 아동노동 착취, 방글라데시 노동자 1000여명이 사망한 다국적 의류브랜드의 공장 붕괴사건 등 수많은 사고들이 소비자와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고 사고를 낸 기업들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지난 20여년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경영이 빠르게 확산됐다. 기후위기와 코로나19 위기는 이런 변화를 획기적으로 가속했다. 환경·사회·지배구조를 뜻하는 ESG는 기업경영과 투자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고,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RE100을 선언하고 나섰다. 더 이상 환경과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기업은 소비자와 투자자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이제는 시민과 국가는 물론 기업도 정의로운 혁신을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어려운 철학자의 정의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국가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나름의 세계관 속에서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혁신을 이뤄야 발전과 번영을 지속할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혁신은 그 과정과 결과에서 정의로움을 필요로 한다. 기술탈취, 단가 후려치기, 타인의 성과를 편취함이 없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돈벌이만을 목적으로 하는 혁신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개선하고 사회적 책임과 가치를 추구하는 혁신을 말한다. 정의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은 문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민주주의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시민, 소비자, 투자자의 투표를 통해 민주적으로 타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만큼 ESG 성과로 국가와 기업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불공정한 기업 간 거래, 열악한 노동조건, 기업가치에 반하는 지배구조, 이런 사회적 문제와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개선하여 높일 수 있는 기업가치는 다른 선진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정의로운 혁신은 불공정한 한국자본주의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혁신적 벤처와 혁신적 중소기업들이 대기업과 상생하는 기업생태계야말로 한국 경제가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다. 지난주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한국 경제의 도약을 위한 기회의 공간을 넓히는 계기였다고 평가한다. 미국의 원조를 받던 가난했던 나라가 이제는 선진기술과 자본으로 에너지전환, 디지털전환, 그리고 의생명과학 혁신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폭넓은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성과를 거뒀다. 정의로운 혁신으로 글로벌 자본주의 대전환의 기회를 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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