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고 신나는 일이다

2021.07.05 03:00 입력 2021.07.05 03:02 수정

해마다 두 번, 1월과 6월에 농사 계획을 세우고 나면 생명을 품어 살리는 산밭을 두루 다니며 인사를 드린다. 개울 옆에 있어 개울밭님, 돌담 앞에 있어 돌담밭님, 샘이 있어 샘밭님, 박하가 자라 박하밭님, 농기계가 들어가지 않아 손으로만 농사짓는 손밭님…. 이렇게 밭마다 이름을 불러주며 감자 캔 밭엔 녹두를 심고, 양파 뽑은 밭엔 들깨를 심고, 마늘 뽑은 밭엔 김장 배추와 무를 심을 거라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기도를 드린다.

서정홍 시인

서정홍 시인

“하늘과 땅이 있고, 따뜻한 햇볕이 있고, 시원한 비가 내리고, 맑은 구름이 흘러가고, 어김없이 낮과 밤이 찾아오고, 봄여름가을겨울이 있어 농사를 짓습니다. 산밭님들, 부디 자연을 벗 삼아 이 땅에 심을 농작물이 기후변화와 병해충에 잘 견디어 튼튼하게 자라 사람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6년 전, 2015년 그해도 산밭을 두루 다니며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정홍아, 네가 농부로 산 지 어느덧 10년이 지났는데 여태 무얼 했느냐? 땅에 뿌리내리느라 그리고 식구들과 먹고사느라 바빴지. 먹고사는 일, 참으로 소중한 일이지. 그러나 함께 먹고사는 일은 거룩한 일이야. 이제부터는 가까운 마을에 사는 청년 농부들한테도 관심을 가지고 함께 먹고사는 일을 찾아보렴.”

그 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이웃 마을에 사는 청년 농부들이 떠올랐다. 농촌, 더구나 우리가 사는 산골 마을엔 다행스럽게 청년 농부들(정구륜 20세, 김수연 24세, 김예슬 28세)이 있다. 그리고 청년 농부가 되려고 준비하는 이들도 몇이나 된다. 농사 선배로서 청년 농부들을 위해 무얼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떠오른 게 ‘청년 농부 지원금’이었다.

그날, 어디선가 들려오는 그 소릴 듣고 농협으로 달려가 통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열매지기공동체(뜻을 같이하는 농부들) 모임 때 제안을 했다. “여러분이 한 해 농사지어 도시 사람들과 나눈(판매한) 금액 가운데 1퍼센트만 ‘청년 농부 지원금’ 통장에 넣어주면 고맙겠습니다. 그밖에 다른 수입이 있을 때도 양심에 따라 1퍼센트를 뚝 떼어 조건 없이 넣어주면 고맙겠습니다.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면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조건 없이 지원금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원금을 낸 분의 이름은 밝히지 않습니다. 이 지원금은 농사 선배로서 ‘오래된 미래’인 농업과 농촌 공동체를 지키고 살리려고 애쓰는 청년 농부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는 데 쓰겠습니다. 청년 농부 대상 나이는 18~40세로 정합니다. 농촌에서 어떤 일을 하든 10평 이상 텃밭을 일구어야 하며, 농촌에서 뿌리를 내리겠다고 약속을 해야 합니다. 지원 금액은 3년 동안, 3월에, 해마다 100만원씩 지원합니다.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행사와 교육 활동에도 지원금을 드립니다. 단 공동체문화를 일구기 위해 세 가구, 세 사람 이상 활동을 할 때 드립니다. 청년 농부들의 특별한 행사와 교육 참가비는 인원에 상관없이 지원할 수 있습니다.”

그해 3월부터 공동체 식구들이 지원금을 내기 시작했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쓰면 다시 채워지는 지원금 통장은 아직도 모자람이 없다. 농부들 스스로 농촌 공동체를 살리려는 따뜻한 마음은, 청년 농부들의 꿈과 함께 언제까지나 식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고맙고 신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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