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2021.09.11 03:00 입력 2021.09.11 03:01 수정
김지연 전시기획자·d/p디렉터

레온 페라리, 이웃, 1980, Daros Latin America Collection, ⓒ Leon Ferrari

레온 페라리, 이웃, 1980, Daros Latin America Collection, ⓒ Leon Ferrari

종교, 정치에 대한 논쟁적인 작품으로 권력자들과 갈등을 빚던 아르헨티나 작가 레온 페라리(1920~2013)는 1976년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독재정권의 억압을 피해 브라질로 망명했다. 그 시기, 아르헨티나에서는 많은 이들이 죽고 실종됐다.

브라질 망명 후, 가톨릭교회와 독재정권의 연대를 날카롭게 비판하던 페라리는 권력이 공간을 재편하여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부조리가 삶의 기술인 양 흘러넘치는 사회에서 비정상을 정상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힘은 광기가 아닌가 생각했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판단은 금기에 가깝다. 광기는 공간에 스며들어 사람들을 억압한다. 그는 도시계획 도면의 형식을 빌려 그가 목격하고 있는 도시의 현실을 표현했다.

그가 그리는 도시는 비현실적인 계획, 터무니없는 증식이 혼재되어 있는 미로 같은 구조다. 작가는 지도가 전쟁을 비롯한 군사적 목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에 주목하며, 이 작품을 통해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의 특징을 환기하고자 했다.

담벼락, 모퉁이, 골목길, 건물, 자동차, 공원, 나무 등 도시의 구성 요소들 사이로 자동차, 남성, 여성, 문, 화장실, 침대가 자리 잡는다. 사람들은 어딘가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거나 막다른 길에 갇힌다.

도시의 패턴을 따라 길을 나선다면, 그들의 행동은 어쩔 수 없이 공간의 패턴에 지배받는다. 그 패턴이 한없이 비합리적일지라도 ‘공공’이 어떤 이유로든 지지하고,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패턴은 더 공고해진다.

그 환경에 동의하지 못하는 개인만 소외될 뿐이다. 작가는 비합리적인 도시 패턴을 따라 방황하는 현대인의 풍경 안에 아르헨티나에서의 생활을 지배했던 광기, 감금, 질식의 감정을 응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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