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

2022.01.17 03:00 입력 2022.01.17 03:03 수정
김정수 시인

[詩想과 세상]트랙

여자가 쉐타를 푼다

남자의 뺨을 때리던 오른쪽 팔이 없어졌다

구경하던 왼쪽 팔이 없어졌다

잠시 여자가 손을 멈추고 인공눈물을 넣는다

다시 목을 푼다 목을 꺾듯

아직도 붉은 꽃을 가슴에서 풀어낸다

꽃이 사라지자 가슴도 사라졌다

마라톤 선수처럼

여자가 달린다 여자를 따라 빙빙 털실이 달린다

트랙을 수백 바퀴 돌아도

여자의 눈물을 훔쳐 간 도둑을 잡을 수가 없다

털실 뭉치가 자꾸 커진다

남자를 다 풀어낸 여자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다시 눈물을 넣는다

아무도 여자가 운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화은(1947~)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떠났다. 구체적인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여자가 남자의 뺨을 때린 것으로 보아 이별의 원인이 ‘남자의 배신’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사랑하다가 헤어지는 건 흔한 일이지만, 남자의 “목을 꺾”고 싶을 정도로 배신감이 크다. 눈물이 마를 만큼 울다 보니 남자에게 주려고 뜬 스웨터가 눈에 들어온다. 볼 때마다 남자가 생각날 것이므로 여자는 울면서 스웨터를 푼다. 복잡한 심경이다. “구경하던 왼팔”은 방관자처럼 무심한 주변 사람들이다.

흔히 인생은 트랙을 도는 것이나 마라톤에 비유된다. 풀리고 감기는 털실은 여자의 심정을, 스웨터는 남자를 대변한다. 여자는 오른팔과 왼팔을 풀고, 가슴 부위의 붉은 꽃을 푼다. “아직도”는 슬픔의 거리다. 털실 뭉치가 커질수록 스웨터는 점점 형체를 잃어간다. 그렇게 남자도 잊히면 좋으련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러한가. “여자가 손을 멈추고” 넣는 ‘인공눈물’은 남자의 사랑이 가짜라는 의미다. 사랑의 상실과 슬픔을 딛고 다시 짜는 스웨터가 진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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