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없는’ 중도층의 생각

[이진우의 거리두기]‘생각 없는’ 중도층의 생각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중원에서는 서로 중도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싸움이 치열하다. 두 진영으로 나뉘어 적대적으로 대립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중도층이 갑자기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두 정당의 세력이 비슷하여 백중세를 이룰 때는 중도층이 그 승패를 결정하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 외에는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 팬덤 정치가 점차 힘을 잃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판세를 가늠할 수 없는 혼미한 지금의 상황이 정치인들에게는 불안하고 불편한 시간일 수 있지만, 그것은 어쩌면 거꾸로 건강한 민주주의의 중간 허리인 중도층을 복원할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그런데 각 정당이 중도층의 표를 갈구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중도층을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중도층으로 확장하거나 적어도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만,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말한 것처럼 이번 대선은 조마조마한 초박빙의 ‘진영 싸움’일 수도 있다. “걱정하지 마라. 안 진다”는 그의 말은 자신감보다는 오히려 불안감을 내비친다. 적대적으로 분열된 정치문화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결국 우리 편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러난다. 중도층은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이 짙게 깔려 있다.

진영논리에 영혼이 잠식된 정치인들은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만이 생각할 줄 알고, 그들과 다른 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생각이 있다면 우리 당 후보가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는 것을 왜 모를까? 한 진영에 속한 사람이 이렇게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면, 다른 진영에 속한 사람은 이렇게 응수한다. 감히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천박한 쌍욕을 거리낌 없이 해대는 사람을 어떻게 대통령 후보로 내세울 수 있는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부적격자라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는데, 어떻게 사람들은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 것일까? 사람들은 상대방을 이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열광적인 맹신자로 배척하면서 자신만이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내세운다.

정치빠, 맹신으로 독재 토양 조성

두 진영의 중간에 서 있는 중도층이 정치적 진지전의 총알받이가 된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회가 급격하게 변하는 역동적 상황에서 중간은 결코 안정과 평화의 지대가 아니다. 바로크 시대 어느 시인의 말처럼 “위기와 엄청난 비상사태에는 중간의 길은 죽음을 가져온다”. 양 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중도층이 관심을 받는 것은 오직 선거 때뿐이다. 중도층은 이성적 숙고와 선택을 강요받는다.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말한다. 잘 생각하면 선택은 결국 우리 당일 것이라고 설득한다. 중도층은 마치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도 없는 것처럼 취급받는다.

중도층은 정말 생각이 없는가? 중도층을 향해 생각이 없다고 비판하는 정치적 진영이 생각이 없는 것인가? 정치는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놓고 벌어지는 정치권력의 싸움이다. 나라가 나아갈 방향이 ‘비전’이라면, 정치권력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의 말로 표현하면, ‘비전 없는 정치권력’은 맹목적이고 ‘정치권력이 없는 비전’은 공허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진영논리는 비전에 대한 정책적 대결은 하지 않고 오직 정권 유지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의 비전을 생각하지 않는 이런 정치권력은 자신들의 정파적 이익이 마치 국민의 이익인 것처럼 위장하고 선전한다. 진영논리는 자신들만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자기기만에 기반한다. 이렇게 진영논리는 독선과 독재의 토양을 만들어낸다.

보수와 진보의 양극단 사람들에게 중도층은 의심스러운 존재이다. 그들은 확신과 신념이 없이 기회에 따라 이리저리 쏠리는 사람들이라 의심받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바로 광화문 촛불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중도층이었다. 이들은 우리나라 팬덤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한 박사모의 무조건적 충성과 극렬함에 비판적 거리를 둠으로써 문재인 정권의 탄생에 도움이 되었다. 소위 말하는 극렬한 ‘정치빠’와 거리가 먼 유권자 집단이 바로 중도층이다.

중도, 비판적 지지로 정치적 균형

이런 중도층이 이제는 운동권 정권이라 할 수 있는 문재인 정권에 등을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 박사모 못지않게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집단인 ‘문빠’에 기반한 팬덤 정치가 국가를 두 진영으로 분열시키고 정치문화를 타락시키는 것을 목도하였기 때문이다.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던 것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국가통합이라는 비전을 믿었던 중도층의 지지가 ‘문빠’의 맹목적 지지와 혼동되고 이용당하는 사실에 분노한다. 중도층은 맹목적인 박사모도 싫어하고, ‘문빠’도 싫어한다. 자신만이 옳고 자신과 다른 집단은 무조건 틀렸다는 팬덤 정치가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중도층이다.

중도층은 이렇게 우리 사회가 양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정치적 균형추다. 중간에 서야 좌우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중도층은 좌우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를 감각적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어떤 정치적 집단에도 맹목적이고 열성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그들도 물론 투표를 하는 순간 어느 한편을 선택해야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들의 선택은 ‘비판적 지지’에 가깝다. ‘내가 지지하는 사람은 완전무결해서 무엇을 해도 괜찮아.’ ‘내가 지지하는 정당은 선이니까 어느 정도의 오류는 문제가 되지 않아.’ ‘정치빠’들이 이렇게 말하곤 한다면, 중도층은 어떤 정치적 무결함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약점과 결점을 인정하면서도 ‘더 나은 정치’를 위해 더 적합한 후보를 선택하고 투표한다.

‘정치빠’들이 보이는 절대적 신념과 맹목적 확신이 없기 때문에 중도층은 공격을 받는 것이다. 그것도 ‘생각이 없다’는 가장 모욕적이고, 가장 잘못된 공격을 받는다.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만큼 모욕적인 말도 없다. 이 말을 좀 더 본질적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신념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근거로 지지 후보를 정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진리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어느 편이 진리인지를 확신하는 ‘정치빠’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의 진리를 확신하기 때문에 묻지도 않고 의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생각하기도 전에 후보를 정하고 열광적 지지를 보낸다. 도대체 누가 더 생각이 없는 사람들인가? 맹신하는 ‘정치빠’들인가 아니면 비판적인 중도층인가?

중도층이 생각이 없다는 비난은 건전한 정치문화를 갉아먹는 최대의 오류이다. 선거 때마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거짓 예언자’가 등장한다. 모두 유권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다. 그들은 자신만이 진정으로 생각하고, 생각 없는 유권자들은 포퓰리즘의 희생자가 된다고 안타까워한다. 어떤 때는 유권자인 국민 전체를 생각이 없다고 질타하지만, 진영이 확실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생각 없는 집단은 중도층으로 좁혀진다. 그러나 중도층은 사안에 따라 자기 입장을 정하는 유연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진리’를 확신하지는 않지만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중도층은 한 사람, 하나의 진리, 하나의 정당만을 지지하는 ‘정치빠’와는 달리 포퓰리즘에 저항할 수 있는 면역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독선이 진리의 폭정을 낳고 독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 중도층이 이제 선택할 시간이다. 비전도 명확하지 않고 정책의 차이도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도층은 무엇을 근거로 선택해야 하는가? 중도층은 정치는 진리가 아니라 의견의 영역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중도층은 같은 사안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상식을 가진 집단이다. 중도층은 민주주의 전제조건이 의견의 다양성이고, 다양한 의견을 통한 견제와 균형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후보, 어떤 정당이 독선과 독재의 유혹에 덜 빠질 수 있는지를 판단하기만 하면 된다. 어떤 정당이 헌법정신과 민주주의에 더 기여할 수 있는가만을 생각하면 된다. 그것이 생각 없다고 비난받는 중도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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