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주의를 경계한다

2022.03.09 03:00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이진우의 거리두기] 유라시아주의를 경계한다

“깨어나 보니 다른 세계였다.” 2022년 2월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의미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분명히 시대 전환의 기호가 될 것이다. 시대 전환은 그 이전의 세계와 그 이후의 세계가 극명하게 갈라질 때 우리가 즐겨 입에 올리는 용어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변화와 전환을 너무 자주 듣다 보니 이 용어가 식상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이제까지 익숙했던 많은 것과 결별해야 할 것이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가 우크라이나 위기로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에서 고백한 것처럼 많은 사람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 그는 심각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소문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치인들과 외교 전문가들은 너무 순진했던 것인가? 그들은 ‘냉전 2.0’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은 했지만, 지금 우리는 ‘실제 전쟁’을 목도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우리는 비교적 긴 평화의 시기를 누렸다. 모든 갈등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평화의 패러다임’이 지배적이었다. 이제 우리는 실제 전쟁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정의로운 전쟁’의 이념을 파괴하였다. 전쟁을 선포하고 수행하려면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런 전쟁의 윤리가 전쟁을 실제로 막지는 못하지만, 국제법과 국제협약은 ‘전쟁할 권리’를 제한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했다. 국가 이익이나 군사적 긴급 상황은 항상 도덕적 우려를 압도하기에 전쟁의 윤리를 운운하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는 정당한 이유 없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강자의 권리’가 국제정치의 핵심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우리는 이제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명분보다는 실리, 대화보다는 갈등, 평화보다는 전쟁이 선호되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 것 같다.

푸틴 책사 두긴의 파시즘적인 비전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이 일찍이 예견했던 ‘문명의 충돌’을 폭력적 방식으로 현실화하고, 세계의 지정학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전환에 직면하여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하나는 전쟁의 동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 전쟁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이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왜 이 전쟁을 벌인 것인가? 왜 사람들은 독립적인 자주 국가를 침략한 러시아의 푸틴을 규탄하지 않고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치적 무능을 조롱하는가? 논란을 빚은 이재명 대선 후보의 말은 매우 의심스럽다. 겉으로는 러시아가 주권과 영토를 침범한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하면서도, 안보를 위해서는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속내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유라시아주의’에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현존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면서 서구사회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에 취해 있을 때, 지구의 중앙에 있는 러시아는 좌절감과 모욕감을 겪으며 이를 보상할 대안을 찾고 있었다.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중국제국과 미국제국의 충돌에 가려졌던 러시아는 그동안 미국과 유럽의 패권에 맞설 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켰다. 그것이 바로 ‘유라시아주의’(Eurasianism)다. 유라시아주의는 자유민주주의를 악으로 규정하고 전통적 가치를 복원하여 동양과 서양을 통합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러시아 제국주의의 정치적 종교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유라시아주의를 실현하겠다는 푸틴의 의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유라시아주의의 실체를 파악하려면, 우리는 푸틴의 책사로 여겨지는 기괴한 사상가 알렉산드르 두긴과 맞닥뜨려야 한다. 나는 오래전에 이 사상가를 하이데거의 파시즘 전력과 관련하여 알게 되었다. 그는 서구의 현대성을 근본적으로 비판한 하이데거를 플라톤 이후의 최고 사상가로 평가하면서 그의 철학을 자기식으로 전유하여 러시아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고자 한다. 박식하지만 허황하고, 철학적이면서 지극히 정치적인 그의 사상은 당시 너무 환상적이고 허무맹랑하다고 생각되어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그가 발전시킨 유라시아주의의 위험성을 고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유라시아주의는 첫째 지정학적 혁명을 추구한다. 두긴은 세계를 구미, 유라시아 및 그사이의 주변지역이라는 세 개의 큰 공간으로 나누지만, 궁극적으로는 미국이 지배하는 동질화된 ‘신세계질서’와 러시아 중심의 ‘신유라시아질서’를 대립시킨다. 그에 의하면 서구는 근본적인 위기에 처해 있으며, 실제로는 죽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서구는 데카당스의 표본이며, 유라시아주의는 서구와 반대되는 모든 것을 대변한다. 그는 인권,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보편적인 가치로 인정하지 않는다. 유라시아주의는 개인의 가치와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반자유민주주의다.

둘째, 유라시아주의는 인종주의와 전통주의를 결합한 ‘초민족주의’를 추구한다. 그는 겉으로는 러시아의 부흥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나치라고 비난하면서도 속으로는 독일의 나치즘을 수용한다. 두긴의 사상이 왜 이렇게 모순적인가를 알려면 그의 동기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두긴은 ‘또 다른 문화전쟁을 일으키자’라는 제목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는 ‘현대성’과 ‘전통’이라는 두 가지 프레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현대성의 모든 산물은 사악하고 퇴폐적이라고 배격한다. 그는 현대성과 관련된 모든 사상과 문화를 극복하고 전통으로 돌아가려 한다. 위기가 표출되는 종말의 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작’이라고 말하면서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온전하게 계승하고 있는 것이 바로 ‘러시아 정교회’라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가장 이상적인 민족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유라시아주의는 이렇게 문화전쟁을 폭력적으로 수행한다. 그의 말처럼 이 전쟁이 우크라이나의 키이우(키예프)에서 끝날지는 모를 일이다.

자유, 지킬 힘 가진 자에게만 주어져

끝으로, 유라시아주의는 새롭게 재탄생한 러시아제국을 꿈꾸는 새로운 파시즘이다. 영국의 정치이론가 로저 그리핀에 따르면 파시즘은 언제나 현재의 위기와 데카당스를 극복할 문화적 ‘재생’을 꿈꾼다. 퇴폐적인 러시아의 현재 상황을 넘어 새로운 역사 단계로 넘어가려는 알렉산드르 두긴의 신비주의적 비전이 바로 유라시아주의다. 그는 죽어가는 구미에 대항하여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되지 않은 새롭고 신성한 공동체를 건설하려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파시즘, 이것은 민족주의이긴 하지만 어떤 민족주의도 아닌 혁명적인, 반항적인, 낭만적인, 이상주의적인 민족주의의 형태이다. 이 민족주의는 불가능한 꿈을 실천하고, 영웅과 초인의 사회를 탄생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위대한 신화와 초월적 관념에 호소한다.”

두긴이 열망하는 유라시아주의의 새로운 질서는 오직 전체주의 제국을 수립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러한 열망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이러한 정치적 종교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자유, 인권, 권리, 인간 존엄과 같은 현대성의 산물을 인정한다면, 이런 가치를 파괴하는 광신적 파시즘에 넘어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단지 우려되는 것은 반미정서와 함께 자라난 낭만적 유라시아주의 정서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미국제국의 패권을 비판한다는 명분으로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경시하거나 부정하는 세력이 있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대륙으로 뻗어 나가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한편 망각한 대륙의 기상을 회복하여 순수한 민족 문화를 재생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다른 한편 이러한 문화적 개벽을 통해 새로운 지정학적 질서를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운동권 세력에 팽배한 민족주의가 순진하게 유라시아주의에 편승한다면, 우리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험을 간과하거나 경시할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의 세계는 다른 세계일 것이고, 세계의 지정학적 질서는 재편될 것이다. 핵전쟁의 위협까지 서슴지 않는 푸틴의 침공은 세계를 단숨에 깨워 놓았다. 자유는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낭만적 유라시아주의를 강력하게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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