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의 ‘편파해설’

2022.02.17 03:00 입력 2022.02.17 03:01 수정

얼마 전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봤다.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의 경기를 중계하던 이상화 해설위원의 모습이다. 화면을 보지 않았다면 한국 선수 경기로 오해할 뻔했다. 이상화는 시종 편파적으로(?) 고다이라를 응원하다 뒤처지자,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안타까워했다. 고다이라 선수의 격차가 벌어지자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표정과 눈물에 가득 찬 진심은 누구나 동감할 것이다.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에 대한 우정일 수도, 또는 벌써 만 36세가 된 스케이터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겠다. 친구의 눈물어린 ‘편파해설’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기 직후 한국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자 고다이라는 “Where’s 상화?”라고 하더니 한국말로 “상화, 잘 있었어? 보고 싶었어”라며 웃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지난 평창 올림픽에서 이 두 사람이 보인 모습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거다. 고다이라의 올림픽신기록 수립에 환호하는 일본 관중에게 “쉿~~”하며 정숙을 요청하던 모습 말이다. 바로 뒤이은 이상화의 경기를 배려한 행동이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그녀는 “페어하게 경쟁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이상화가 은메달이 확정된 후 눈물을 터뜨리자 다가가 한국말로 “잘했어”라고 했다. 아침저녁으로 혐한방송을 하던 일본의 TV프로그램도 이 장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그날만은 ‘일·한의 우정’을 소리 높여 외쳤다.

아마도 이것은 인간사의, 스포츠의, 혹은 올림픽의 어떤 한 경지를 드러낸 장면일 것이다. 고다이라의 말대로 ‘얼음과의 대화’로 청춘을 보낸 고독했을 두 사람이, 자신의 라이벌에게서 얼음을 녹이고도 남을 따뜻한 정을 찾아내고 나누었다. 그들이라고 질투, 시샘, 혐오가 한때나마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얼음에게만은 잃지 않았던 두 개의 진심이 이를 뛰어넘게 했을 것이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의 편파 판정 논란이 뜨겁다. 편파 판정은 규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흥분의 도가니에서 규탄은 어느새 혐오로 번진다. 급기야 어제는 “일본은 한국인이어서 싫어하지만, 중국은 사람이기 때문에 싫어한다”는 인터넷 댓글까지 보고야 말았다. 덕분에(?) 일본에 대해서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예를 들어 “일본 정부는 나쁘지만 일본인은 만나보면 착한 사람 많다”와 같은 유다. 혐오는 새로운 먹잇감을 찾는 괴물이어서 어제의 혐오 대상에 오늘은 아무 이유 없이 관대해진다.

‘혐오는 혐오를 낳는다’는 진부한 말을 하려는 것, 맞다. ‘욕하면서 닮는다’는 흔해 빠진 말을 하려는 것, 맞다. 상대가 일시적으로 극악한 짓을 해서 악마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든 국가든 오랫동안 모든 면에서 악마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그 상대보다 언제나 반드시 낫다고도 장담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장담하는 순간이야말로 욕하던 그 모습의 길로 접어드는 입구다. 사람 다 거기서 거기다.

우리 사회에서 진영논리가 기승을 부린 지 꽤 되었다. 진보-보수, 한국-일본, 이제는 남-여, 청년-노인까지…. 상대를 통째로 악마화하고 저쪽에도 다양한 결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또 상대가 저질렀던 바로 그 행동이 같은 진영에서 보이는 건 못 본 체한다. 그걸 비판하려면 독립운동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다 어느덧 비슷해져 간다. 승리를 쟁취한 혁명정부가 구체제보다 나을 것 없는 정권으로 되어 버리는 것도, 꿈에 그리던 독립을 쟁취한 민족주의자들이 식민주의자들 같은 폭압을 일삼게 되는 것도 이러다 생긴 일이다.

이렇게 보면 “이게 나라냐!”며 비장하게 출발한 정부가 “이건 나라냐!”라는 냉소에 직면한 것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어느 쪽이 될지 모르지만, 곧 출범할 새 정권도 자신이 전 정권보다 더 나을 것도 없다는 자세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그나저나 고다이라랑 경기했던 선수는 이상화한테 서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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