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가 사라졌다

2022.05.04 03:00 입력 2022.05.04 03:02 수정

[이진우의 거리두기] ‘사과’가 사라졌다

‘사과’가 사라졌다. 범죄소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말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이다. 이쯤 되면 기후변화로 사과 경작지가 점점 더 북상하는 현상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한반도 기온이 상승하면서 농작물 재배지역이 북상하여 대구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사과가 사라졌다. 서늘한 지역에서 잘 자라는 북부 온대 과수인 사과가 대구를 떠난 이유는 더위 탓이다. 사과가 특정 지역에서 사라지는 것이 기후변화에 따른 생태계의 이상 현상이라면,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사과(謝過)가 사라지고 있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 무엇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징후이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우리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과를 달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사과하고, 거짓말했다고 사과하고, 복잡한 전철 안에서 발을 밟았다고 사과하고, 하다못해 어느 코미디언의 말처럼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한다. 괴테는 일찍이 <파우스트>에서 “인간은 노력하는 한 실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인간이란 본래 실수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사과’의 행위는 사회적 관계에서 필수적이다. 사과는 실수와 잘못으로 인간관계가 어긋나고 틀어지지 않도록 하고,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행위에 뭔가 이상 징후가 생긴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삶을 현실적으로 그리는 좋은 드라마는 종종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게 만든다. 최근 내가 재미있게 보고 있는 주말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매우 흥미로운 대사가 나온다. 회사에 다니는 두 사람이 “사과하세요!”라는 말이 매우 불편하다고 공감하면서 나누는 대사는 사과의 의미와 기능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잘 말해준다. A: “아니, 회사에서 어느 조사원이 나한테 ‘사과하세요’ 이러는데,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말문이 막히는데, 내가 뭐 잘못했지?” B: “‘나 기분 나쁘다. 너 잘못했다.’ 뭐 거기까진 말할 수 있어요. 근데 ‘사과하세요’는 논쟁의 여지를 틀어막고 그냥 결론 낸 거잖아요. 난 피해자, 넌 가해자.” 사과는 본래 잘못한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수동적 행위인데, 이제는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게 강요하는 능동적 행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사과는 이젠 덕성 아닌 비굴이 돼

왜 사과가 상대방을 공격하는 도덕적 가해행위로 변한 것일까? 굳이 ‘사과의 사회학’을 발전시키지 않더라도 이 드라마는 사과 행위의 미묘한 변화를 정확하게 짚어낸다. ‘사과하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사형선고를 받고 구덩이에 떨어져서 시멘트까지 부어진 느낌”을 갖는다는 것이다. 당혹감,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당황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러한 당혹감은 결국 뭘 잘못했는지 모르면서 사과하게 만든다. 사과를 한 사람이 진 것이라고나 할까. 드라마의 여자 행위자가 말한 것처럼 ‘사과하세요!’는 “신종 싸움의 기술, 선빵의 기술”이 된 것이다. 어떤 한 인간이 고통을 감내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성찰하고 용기 있게 하는 덕성의 행위인 사과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과는 이제 강요에 의한 비굴한 행동으로 전락했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지 잠재적 투쟁의 당사자인 ‘나’와 ‘너’만 있지 뭔가를 공유할 수 있는 ‘우리’가 없다. 이 말은 오해될 가능성이 크기에 미리 바로잡아야겠다. 개인주의가 모든 도덕적 타락의 원인이라는 말은 결단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에 가깝다. 우리가 모두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점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개인으로서 실수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은 다 실수할 수 있다. 그런데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배제된다. 뭔가 잘못되었다면, 그건 틀림없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책임이어야 한다. 집단은 개인을 보지 못하게 하고, 개인이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여지를 주지 않는다. 뭔가 잘못되었다면, 우리 모두 얼차려를 해야 한다. 그런데 본래부터 우리란 없다 보니, 집단주의는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희생양을 찾아야 한다. ‘나는 아니야’라고 주장하면서 눈에 불을 켜고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아내 ‘사과하세요!’라고 강요한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면서도 사과를 해야 하는 사회는 개인이 없는 집단의 병리적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는 항상 ‘나’만 옳아야 하고, 틀렸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너’여야 한다. 서로 생각은 다르더라도 정의를 위해 촛불을 들었던 ‘우리’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 자신의 참호 속에 몸을 숨기고 상대방을 향해 총질을 해대는 진영 싸움의 ‘나’와 ‘너’가 되지 않았는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분열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성찰과 용기가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싸움에서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야장천 상대방에게 ‘사과하세요!’라고 강요하는 수밖에.

그런데 진정한 사과가 사라진 사회에는 역설적으로 사과가 흘러넘친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면서 사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내던지는 사과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미안해요’ ‘죄송해요’는 무의미한 상투어로 전락한다. 잘못한 게 무엇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강요된 사과는 일단 불필요한 싸움은 하지 말자는 신호이다. 사과했는데도 거듭 사과를 요구하면, 힘을 줘 말한 ‘미안합니다’는 더 세게 반격할 수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싸우고 싶은데, 싸워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사과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더욱 작게 만든다.

지금 우리의 민낯 ‘사과하세요!’

싸울 상대가 없어도 우리는 ‘미안해요’(sorry)를 습관적으로 입에 달고 산다. 모든 게 미안하다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미안하지 않다는 뜻이다. 어느 사회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사실 ‘미안하지만 미안하지 않아요’(sorry not sorry)의 의미다. 미안하지 않아서 미안하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서 미안하고, 미안한 게 미안하다. 사과하지 않아서 미안하고, 사과해서 미안하다. 사과의 무의미한 회전목마가 돌아갈 뿐이다. 본래 미안(未安)하다는 마음이 편치 못하고 부끄럽다는 뜻이다. 진정한 사과가 사라진 오늘날 우리는 모두 어딘지 마음이 불편하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사과의 행위가 공격적으로 변한 이유다.

사과가 지나치게 남발되거나 공격적 비난으로 변질된 사회는 비정상적이다. 사과가 관계를 맺는 두 인간이 서로 가질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상호작용 중 하나인 까닭에 사과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건강한 사회관계를 기대할 수 없다. 사과는 당혹감과 비난의 표현이다. 사과할 때 우리는 어떤 행위가 기대되었는지 알고 있으며,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부정적 제재에 공감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사과는 언제나 이중적이다. 사과는 한편으로 자신이 잘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유발하는 사회적 규칙을 확인한다. ‘미안해요’라는 말은 내가 일시적으로 위반한 사회적 규칙을 복원함으로써 우리의 관계가 다시 정상화되기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새로운 시작을 원하는 진정한 사과의 핵심은 ‘진정성’과 ‘타이밍’이다. 어떤 사과는 용서와 화해를 가져오지만, 어떤 사과는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다. 사과는 대체로 잘못을 인정하고, 잘못한 행위를 충분히 설명하고, 피해자에게 상처를 준 행위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을 표현하고, 이에 대한 보상을 실제로 또는 상징적으로 제공할 때 효과적이다. 사과는 피해자의 느낌과 감정에 달려 있으니 사과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사람들은 감으로 알 뿐이다. 사과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다른 하나는 타이밍이다. 너무 늦게 사과해도 효과가 반감되지만, 사람들이 너무 빨리 미안하다고 말하면 화해의 중요한 계기와 과정을 놓칠 수 있다.

진정한 사과가 사라지다 보니 이제는 사과하는 법도 잊는 모양이다. 최근 퇴임을 앞둔 문재인 대통령이 손석희 전 JTBC 앵커와 한 대담이 논란이다. ‘지금 이 시점에 꼭 필요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그래도 임기 동안 잘한 것, 잘못한 것에 대한 진솔한 말을 기대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인정은 새로운 시작의 씨앗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단다. ‘미안한 게 없어서 미안해요.’ 이 말을 들은 다른 진영은 다시 외친다. ‘사과하세요!’ 이것이 사과가 사라진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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