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통합 위한 ‘진보 우파’를 기대한다

[이진우의 거리두기] 사회 통합 위한 ‘진보 우파’를 기대한다

정권은 바뀌지만, 세상은 아직 변할 것 같지 않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모든 것을 바꿔놓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시대적 전환기에 윤석열 정부가 곧 출범한다. 오랫동안 지속된 코로나 전염병에 이어 전쟁이 터져서인지 시절이 어수선하다. 봄꽃이라도 화사하게 피면 마음이 가벼워지련만, 올해는 봄꽃 소식도 늦다. 춘래불사춘이라 하였던가.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은 추운 날씨가 계속 이어진다. 요즘 정국이 꼭 이와 같다. 선거가 끝나면 일단 새로운 정부가 우리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희망하며 지켜보는 것이 통상의 관례였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건만, 순항하는 데 필요한 훈풍은 불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절망적 두려움의 어두운 그림자가 희망의 빛을 밀어내고 있는 형국이다. 현직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청와대와 인수위원회 사이에서 벌어지는 유례없는 신구 권력 간 갈등은 새로운 정부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 ‘보수 우파’가 정권을 잡았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견제와 균형의 축을 어느 정도 복원하였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새로운 정권은 여소야대라는 불리한 상황에서 자신이 약속한 시대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문제는 권력의 불균형이 아니다. 새로운 정권이 직면하게 될 더욱 커다란 문제는 극단적인 형태로 전개되는 ‘사회의 양극화’이다.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대개 가진 자와 없는 자의 경제적 불평등을 떠올리지만, 우리가 두 개의 적대적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만드는 사회 분열이 훨씬 더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이다. 역사적으로 유례없이 천박하게 치러진 선거가 끝났는데도 양쪽 세력 간 갈등이 치유되기는커녕 혐오와 증오, 음모와 비방의 총탄은 여전히 양 진영에 날아들고 있다. ‘0.73%의 저주’인가 싶을 정도로 선거 이후의 우리 사회가 더욱 분열될까 두렵다.

사회 통합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 그 목소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 사회가 치유하기 힘들 정도로 분열되어 있다는 느낌만 더욱 강해진다. 언제나 그랬다. 5년 전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을 얘기했다. 국민 통합을 이루기 위해 국민과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다. 2017년 5월 국민은 87%의 지지도로 화답했다.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사회가 더욱 분열되었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다.

약자들 문제 혁신해야 ‘진보 우파’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국정 수행 전망에 대해 ‘잘할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이 55%를 넘지 않는다는 사실은 험난한 사회 통합의 길을 예고한다. 윤석열 당선인도 이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국민통합위원회 간담회에서 지금의 상황을 “전시와 다를 바 없다”고 진단하면서 위기 극복은 “단결과 통합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했다. 사회 통합을 위해 우리 사회의 위기를 전시와 비교하는 수사학은 너무 익숙하고 진부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등장하기 때문이다.

해법이 적절하거나 마땅하지 않을 때,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진부하다. 사회를 통합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사회를 통합한단 말인가?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비전과 방향은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윤석열 당선인은 통합과 단결을 강조하면서 “갈등을 야기하고 통합을 해치는 세력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가 두 진영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이 말은 자칫하면 반대하는 상대방을 적으로 돌리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문제는 갈등 자체가 아니라 갈등을 해소하고 치유할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새로운 정부가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진영 갈등’을 치유한다면 성공한 정부가 될 것이 분명하다. 진영 갈등을 치유하려면 갈등의 현상보다는 그 원인에 집중해야 한다. 왜 갈등이 사회를 적대적인 두 진영으로 분열시키고, 이런 진영화가 사회적 갈등을 더 심화시키는지를 알아야 한다. 여러 이유 가운데 민주화 과정에서 형성된 운동권의 이념적 집단화와 경직화가 가장 뿌리 깊다. 같은 이념을 추구하면 같은 편이 되고, 같은 편이면 모든 의견이 같아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굳어졌다. 세상에는 다양한 이념이 있고 또 이념이 같더라도 사안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다원주의의 토양이 오염된 것이다.

다원주의는 사회 통합의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가능 조건이다. 우리 사회에 두 진영만 있고 그래서 두 가지 의견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다원주의는 협동과 통합이 가능하다는 징후이고 지표다. 젠더 문제, 장애인 문제, 동성애자 문제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제기되면 다양한 의견을 통해 담론화되는 것이 아니라 금방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두 진영으로 나뉜다. 건강한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런 진영화가 바로 사회적 갈등의 진정한 원인이다.

이 문제에 대처하려면 새로운 윤석열 정부는 ‘진보적 우파’가 되어야 한다. 문재인 정권이 좌파였다면, 보수의 힘을 업은 윤석열 정권은 우파다. 좌우로 갈라진 우리 사회에서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우파 정권이 진보적 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진보 우파’라는 말이 좀 낯선가? 그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좌파는 진보적이고, 우파는 보수적이라는 편견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 좌파, 보수 우파’라는 공식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이념과 정책 잘 섞여야 진정한 통합

그런데 사회의 진영화 자체가 이러한 공식을 깨뜨릴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지난 5년 동안 좌파가 별로 진보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좌파 운동권은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존하고 유지하려고 보수적 성향을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국 사태와 부동산 정책의 실패는 모두 이념적 경직성에서 기인한다. 자신들만 옳다고 생각하고 의견을 바꾸지 않으려는 태도는 보수의 전형이다. 이러한 이념적 경직성에 기반한 집단의 폐쇄성은 수구적이다. 과거에는 우파에게만 사용되었던 ‘꼴통’이라는 말이 이제는 좌파에게도 적용된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기존의 이념과 사고방식을 고집하는 게 ‘좌파 꼴통’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윤석열 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우파는 이제 ‘진보적’이어야 한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정치적 성향을 표현하는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좌파는 자유보다 평등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우파는 평등보다 자유를 더 우선시한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적 가치는 모두 중요하지만, 우파는 자유 시장을 통해 평등의 사회적 조건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면 좌파는 시장으로 인한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의 적극적인 간섭을 옹호한다. 이런 점에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대개 우파이다.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공정 담론이 사회적 불평등뿐만 아니라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의 절대적 부족’ 때문이라면 시장을 활성화하여 일자리를 늘리고, 그렇게 기회를 확대하겠다는 우파 정권의 출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파가 어떻게 진보적일 수 있는가? 진보는 바람직한 사회로 발전하기 위해 현 상태를 혁신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파는 시장의 원리만을 고집하였다는 점에서 보수적이었다. 우파가 진보적으로 변하려면, 우리 사회에는 ‘시장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약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 공정한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 사회의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은 시장의 이점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특히 여성, 청년, 노인들이 그렇다. 이 문제를 해결할 구체적인 비전과 정책을 선도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진보적 통합 정책이다.

진보 우파가 된다는 것은 진영의 대립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쟁적 정당과 진영의 좋은 이념과 정책은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독일의 우파 정권은 환경과 관련해서는 녹색당으로부터, 복지와 관련해서는 사민당의 정책을 계승했다. 당시 일부 녹색당원들이 ‘우리의 이념과 정책을 훔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사실 좋은 이념과 정책은 많이 훔칠수록 좋다. 그것이 진영이 공고해지는 것을 막고 우리 사회를 다원화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회 통합을 이루려면 이념과 정책이 잘 섞여야 한다. 진보 우파를 기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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