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를 만난 여성들

요즘 또래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봤어?’로 대화를 시작한다. 영화 <슬램덩크> 이야기다. 중학생 시절의 나와 슬램덩크는 곳곳에서 추억으로 엮여 있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지루한 물리치료를 견디게 해준 것도 슬램덩크였고, 친구들이 집에 왔을 때 은근슬쩍 뽐내던 것도 책장에 순서대로 꽂힌 그 만화책이었다. 잘생긴 엘리트지만 차가운 서태웅파인지, 열정과 의지의 마초맨 정대만파인지는 우리들의 상상연애담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이기도 했다. 하여튼 그땐 정말 진심으로 그 만화에 다들 빠져 있었다.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해야 된다는 것, 이만번의 연습이 모이면 나의 인생을 바꿀 한 방이 만들어진다는 것, 공을 패스할 줄 알아야 한 단계 더 성장한 플레이어라는 이 진리를 모두 이 만화가 가르쳐줬다. 그래서 누가 이 짜릿한 스포츠성장물을 우리 딸들에게도 권하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과감하게 말하겠다. ‘<골때녀> 보라고 해. 거기 다 있어’라고.

남고생들의 우정과 사랑, 도전과 성장이 있는 이 만화에는 안타깝게도 여성이 없다. 물론 등장인물 중에는 강백호가 좋아하는 소연이와 송태섭이 좋아하는 매니저 한나가 있다. 그럼에도 이 길고 긴 성장 스토리 중에 거기까지밖에 표현되지 않은 데다, 남자 주인공들과의 관계로밖에 이 캐릭터를 설명할 수 없으니 오롯이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책의 주제가 ‘남자’농구이다보니 표현이 그렇게 됐을 뿐, 이 둘에게도 스토리 밖의 감정과 서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현실에는 진짜 여성의 역할을 거기까지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 전 동네 게시판에 풋살동호회의 선수와 여자 선수 겸 매니저를 찾는다는 광고가 올라왔다. 매너 좋고 시간 약속 잘 지키고 꾸준히 운동할 남자 회원 모집 글에는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런데 여자 선수를 뽑는 글은 좀 다르다.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문장이 총 세 번이나 등장한다. 보지 않는다니 다행이긴 한데, 남자 선수 구인 때는 당연하게도 외모 이야기는 없었다.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니까. 그런데 왜 여자 선수 겸 매니저에겐 외모를 따지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두번째 ‘조건’ 항목에 써놨을까.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이라는 찝찝한 말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이뿐만 아니라 밝은 성격이어야 된다는 말도 두 번 등장했고, 그렇지만 자기 주장이 강하면 안 된다고도 명시했다. 구인광고를 조목조목 읽어볼수록 의문투성이였다. 무슨 역할을 기대하는 것일까. 남자들만 있으면 위화감이 들기 때문에 여자를 뽑고 있다니 이 팀은 여성 선수를 밝은 얼굴로 방긋방긋 웃으며 남성 조직에 활기와 응원을 넣어줄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일까.

어쩌다 이런 공고를 아무 거리낌 없이 올리게 되었을까. 아마도 남성 연대와 성장서사에 양념처럼 여성의 읏음과 응원을 묻히는 방식이 너무 익숙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풋살팀에 여성 멤버가 왜 필요한지, 그 여성은 이 팀에 어떤 기대를 갖고 들어올지 생각해보지 않은 듯했다. 회비 면제라는 조건만으로 혹할 여성 풋살 플레이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슬램덩크에 다시 마음이 들썩이는 2023년의 여성들은 태섭이가 좋아하는 한나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다. 조금씩 성장하고 다시 일어나는 그 주인공의 마음에 이입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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