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집필실

2023.03.04 03:00 입력 2023.03.04 03:02 수정

어린이의 시간은 현재형이다. “어렸을 때는 나도 그랬지”라거나 “어린이는 장차 크게 될 거야”라는 말은 소용없다. 지금 안 놀면 놀 수 없다. 현재의 어린이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사회의 속도가 너무 빠르면 어린이는 위험해진다. 지난달 23일 헌법재판소는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13에 대해 합헌으로 결정했다. 이 법은 2019년 충남 아산의 한 어린이보호구역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김민식 어린이의 죽음 이후 마련된 법이다. 이제 어린이는 학교와 어린이집 앞에서만이라도 자신의 속도를 존중받게 되었다. 헌재는 8 대 1 의견으로 겁에 질린 작은 얼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 하나를 지켜준 셈이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팬데믹 전후에 태어난 어린이들은 밖에서 노는 법 자체를 잘 모른다. 두 다리는 언제 빠르게 뛰는지, 빗물은 어떻게 손바닥을 간지럽히는지, 나무를 꼭 안았을 때 얼마만큼 따듯한지 알 기회가 없었다. 아이들이 차가 다니는 길을 사랑해서 거기서 노는 게 아니다. 아이들은 찻길이 아니라 공원을 원한다. 그림책 <우리는 공원에 간다>를 보면 어린이들은 버스가 달리고 기중기가 버티고 선 죽죽 뻗은 도로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들은 너무 거대해서 자신들과 하나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공원을 사랑한다. 공원에서는 “비가 내리면 꽃들이 비를 가려 준다. 어떤 꽃은 우리 머리만 하다”고 자랑한다. 어린이 공간은 어린이 몸의 작음을 이해해야 하고 어린이 마음의 크기를 감당해야 한다. 책 속에서 어린이가 공원에 가고 싶다고 하면 어른들은 다음에 가자고 대답한다. 아이는 그 나중이 몇 광년 뒤가 될 수도 있는데, 괜찮겠냐고 묻는다. “노란 비옷을 입은 아이도 나무 사이로 사라지고 흐릿한 번개 냄새만 덩그러니 남겠지”라고 경고한다.

개발이익에 사로잡힌 도시는 어린이의 공간을 잠식한다. 그럼에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도서문화재단씨앗’이 감수하고 소개한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아이들을 위한 세계의 공간>이라는 책을 읽었다. 여기 나오는 어린이 공간들은 품위있고 안전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아동청소년 글쓰기 센터 ‘해적상점’을 연 826내셔널의 데이브 에거스는 그동안 어린이 공간 대부분이 아이들의 존재를 기쁘게 환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견디기 위해 디자인되었다고 비판한다. 어린이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운 곳에서 불필요하게 아름다운 것에 둘러싸여보는 경험이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시작한 공간 실험은 지역 어린이들의 삶을 바꿔 놓았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번뜩이는 금이빨과 괴혈병 약을 파는 해방된 공간에 거리낌 없이 들어온다. 삐걱거리는 나무 사다리에 걸터앉아 자신의 오늘을 기록하는 글을 쓴다.

영국 로더럼에 있는 어린이 글쓰기 공간 ‘그림상회’는 “이야기라는 목적지로 가기 전에 환상의 서막을 제공하는 약방”이다. 이곳에서는 ‘실망’을 담은 깡통을 판다. 불만 50퍼센트와 무관심, 소량의 발효된 좌절감이 들어 있다. 이곳에 들른 어린이가 작가가 되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외계인 슈퍼마켓’의 설계자는 어린이 공간의 필수 조건으로 ‘안전한 느낌’을 꼽는다. 여기서 인기있는 물건은 다리가 세 개인 바지다.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는 ‘박쥐동굴’도 재미있다. 버스를 개조한 어린이 글쓰기 공간인데 단 11㎡의 마법 같은 집필실이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곳이 있었다. 박경리토지문학관 마당에 있던 ‘그림책 버스’다. 이 버스는 지역민들의 노력에 힘입어 ‘원주시그림책센터 일상예술’로 발전했다.

우리 어린이에게 안전한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면 그들은 무엇을 할까. 놀고 이야기를 하고 글을 쓸 것이다. 글은 더 잘 살게 하는 힘을 준다. 어린이에게 공원을, 종이와 연필을, 작업실을 주고 그곳에서 모든 어린이가 작가가 되어 보았으면 좋겠다. 진짜 자신의 삶을 쓰는 작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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