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책이 조금 덜 아름답더라도

2023.03.06 03:00 입력 2023.03.06 03:06 수정

종종 아름다운 책을 골라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런 말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책은 대부분 다 아름다운 것 같다고 대답하고, 곧바로 후회한다. 하지만 솔직히 서점에 놓인 책은 대부분 아름답다. 질투가 날 정도로.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서른 살 즈음, 오래된 대학출판부에서 일했다. 사진과 디자인 언저리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만들며 떠돌다가 결국 약간의 멀미를 느끼며 옮겨온 직장이었다. 아름답고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에 쫓기는 것보다는 고즈넉히 자리 잡은 낡은 건물 한쪽에서 두툼한 교정지를 들여다보며 한 시절을 보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요즘에는 아름다운 학술서도 많지만, 당시 대학출판부 책들의 외양은 대체로 투박했다.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느 유쾌한 성격의 교수는 직원들이 여럿 있던 자리에서 우리 책들의 표지가 ‘사회주의 국가 연례보고서’ 같다는 농담을 했다. 그때 나를 제외하고 웃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후에 편집 일을 하면서 나는 생각보다 이 투박한 표지와 본문에 여러 디자인의 요소와 제약에 대한 고민,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이 녹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어 당시 저자 중에는 중국 관련 연구를 오랫동안 해온 학자가 있었다. 사유는 깊고 연구는 견고했다. 정교한 주석 하나하나에 그가 책에 들인 노력이 깃들여 있었다. 대체로 그런 학자들이 표지 디자인에 바라는 것은 오히려 적다. 나는 자기 책이 너무 예쁘게 나오는 것을 싫어하는 저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곳에서 처음 알았다. 아름다움 자체를 민망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고, 책의 고급스러운 물성을 자기 공부의 부족함을 은폐하려는 시도처럼 느끼며 불편해하는 이들도 드물게는 있었다. 표지에 금박을 넣겠다고 하면 그들은 손사래를 쳤다.

이 저자의 요청은 아주 명료했다. 요약하자면 ‘빨간색, 대나무, 판다, 수탉, 중국 지도, 오성홍기가 들어 있지 않다면 무엇이든 괜찮다’ 정도가 되겠다. 이것은 미적인 이유라기보다는 기능적인 이유에서였다. 당연히 그에게는 중국 관련 연구서들이 아주 많았는데, 대부분 표지가 비슷해서 찾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연구실 서가는 온통 붉은 책들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치 북송 때의 문인, 이를테면 구양수 같은 이와 디자인 회의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 눈 내리던 날, 구양수는 손님들과 몇 가지 글자를 금지한 채 시를 짓자고 했다. 예를 들어 옥(玉), 달(月), 배(梨), 매화(梅), 솜(絮), 희다(白), 학(鶴), 은(銀) 같은 글자 없이 눈을 맞이하는 시를 지을 수 있을까? 훗날 소동파는 이를 무기를 버리고 맨손으로 싸우는 백병전에 비유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 책의 디자이너는 솜씨가 좋았고, 도전해볼 만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해주었던 것 같다. 우리는 꽤 멋있는 표지의 책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대체로 당시 학술서 제작 환경에서는 표지에까지 시간과 비용을 충분히 투자하기가 어려웠다. 우리의 부족한 실력으로 디자인에 대한 이런 요청들을 해결하려다 보면, 오히려 더 투박하거나 조악한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문제 해결에 골몰하는 대신 조금 더 세련된 표지의 책을 만들었다면, 과연 더 ‘아름다운’ 것이었을까? 당시 우리는 한자나 다국어 서체와 씨름하면서 복잡한 학술서의 본문을 조금이라도 깔끔하게 만들기 위해 악전고투했지만, 실패하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았다면 책은 훨씬 불편하게 읽혔을 것이다.

한국 출판의 생태계가 그리 풍요롭지는 않지만, 이맘때가 되면 책에 대한 여러 시상식이 열리거나 지원 제도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때로는 참여하면서 나는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상을 받는 이들의 기쁨만큼이나, 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의 노력도 책을 읽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가 집어든 책이 조금 투박하더라도.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