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되돌릴 수 없는 것도 있다

2023.03.27 03:00 입력 2023.03.27 03:01 수정

저녁의 삶 다시 내놓으라고 한다면
순순히 내줄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되돌려선 안 되는 것들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의 ‘주 69시간 근무 논란’ 보도가 CNN과 BBC 등 해외 언론을 타고 있다. 10년 전쯤 노르웨이의 기차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옆자리의 교사와 나눴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딸 하나를 키운 싱글맘이자 고교 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중년의 교사는 한국인과 이야기를 나눈 적은 처음이라며 호기심을 보였다. 그때만 해도 한류 문화가 세계에 알려지기 전이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세 시간쯤 되는 기차 여행에서 우리는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북유럽 국가의 수도에 사는 워킹맘과 동아시아 국가의 수도와 지방을 오가며 일하는 워킹맘은 생각보다 공유하는 것이 많았다. 오슬로에 사는 그녀는 독일의 베를린으로 유학해 박사 학위를 딴 딸에 대한 자랑을 밉지 않게 펼쳤고 나는 ‘대단하다’를 연발했다. 나 역시 대학생이 된 딸이 있고 서툴지만 가사노동을 함께하는 남편이 있다고 소개했다. 다음 문제는 집값이었다. 오슬로의 집값은 그녀 월급으로 감당하긴 벅차고 대출이자가 높아 결국 ‘은행들의 배만 불리는 것’이라며 강한 분노를 내비쳤다. 서울의 집값은 말해 무엇하랴.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선 나 역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가장 오래 이야기한 문제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방송에서 보니 한국에선 일을 저녁까지 한다는데 대체 무슨 일을 그렇게 하나? 반대로 나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노르웨이에선 4시면 퇴근한다는데 집에 가서 무얼 하나?

한국 장시간 노동의 유명세를 실감하면서 나는 애써 이런저런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국으로 압축 성장을 추진해 온 과정에서 노동시간이 길어졌지만 줄여가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고. 그녀의 대답은 집에 돌아오면 가족과 저녁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보낸다는 것이었다. 나의 대답은 그녀를 이해시키기에는 빈약했고, 그녀의 대답을 내가 이해하기 위해선 적지 않은 상상력이 필요했다.

국민의 삶을 좌우하는 정부 정책들이 퇴행에 퇴행을 거듭해 온 지난 몇 개월 한국 사회에서 진행 중인 또 하나의 전투는 시간을 둘러싼 것이다. 시간의 정치,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동시간 연장에 관한, 노동시간체제의 전복에 관한 전투다.

개인적으로 썩 유능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문재인 정부 시절 그나마 점수를 주고 싶은 대표 정책이 주 52시간 노동제였다. 2018년 7월1일부터 시행된 이 정책의 효과가 궁금해 2019년 여름 몇몇 기업을 찾아 노동자 인터뷰를 실시했다. 결과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중대했다. 300인 이상 대기업에 한정된 제도 운용의 결과였지만, 시사하는 바는 몇 마디의 말로 압축하기 어려웠다.

식품 대기업 A사는 주 52시간 노동제로 실질적으로 노동시간이 단축된다고 보아 근무시간 관리시스템을 대폭 개선하고 시차출퇴근제 등 선택시간근로제를 도입했다. 생산과정을 합리화하고 노동자들의 시간 자율성을 통해 업무효율성을 높이려는 전략인데, 업무몰입도가 증가했다는 것이 인사담당자의 말이다. 직원들이 시간외 수당이란 금전적 보상보다 시간 선택지를 넓히고 근무시간을 줄이는 회사의 방침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와 여성, 기혼자들이 적극 호응했고 회사의 조직문화에도 영향을 끼쳐 50대 관리직들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자동차 대기업 B사와 식품 대기업 C사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력이 부족해지자 직원을 대폭 증원했다. 고용이 늘어난 것이다. 여건이 나은 대기업의 경우지만, 그렇지 못한 중소기업은 국가가 지원할 일이다. 노동시간을 늘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국가의 책임을 개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과 다름없다.

‘저녁이 있는 삶’이란 메시지의 등장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노동시간을 어떻게 줄여갈 것인가’가 화두였다. 세계는 이미 1일 6시간 노동, 주 4일 노동제를 실험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의 반대는 예상되는 것이지만, 정부의 오락가락하는 입장은 황당하다.

오랜 논쟁을 거쳐 어렵게 얻은 소중한 시간을 다시 내놓으라고 한다면 순순히 내줄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오전엔 아이를 낳으라고 하고 오후엔 일을 더 오래 하라고 하는 정부 앞에서 국민들은 어떤 심정일까? 합계출산율 0.78명과 주 최장 69시간 노동이란 한국발 뉴스를 읽는 세계의 독자들은 또 어떤 느낌일까? 노르웨이의 그 친구를 다시 만난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되돌려선 안 되는 것들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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