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사회와 그 적들

2024.06.02 20:54 입력 2024.06.02 20:56 수정

윤 대통령 ‘해병대원 특검법’ 거부
국가가 개인의 존엄과 가치 부정

국책연구원 ‘저출산·고령화’ 대책
청년·여성·노인의 자유를 억압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을 때, 위험에 빠진 조국을 걱정하던 사회학자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열린 사회’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비판했다. 20대 청년이던 대학원 시절 책을 읽은 후 나눈 토론에서 나와 동료들은 이 포퍼의 책에 공감하기보다는 회의적이었다. 전두환 정부의 독재에 저항하며 공동체와 사회운동의 가치를 믿었던 20대 청년들이 서구적인 개인의 자유를 역설하는 포퍼의 주장에 마음이 끌리기는 어려웠던 1980년대다.

2024년 20대 청년들과 함께 강의실에서 토론을 주고받는 나는 우리 사회에 더 분명한 자유주의, 더 많은 개인주의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소수지만 자유와 평등을 고민하는 청년과 지식인들이 살아 숨쉬는, 민주주의의 역사박물관 같은 대학 캠퍼스 울타리를 넘어서면, ‘버릇없고 통제불능한 MZ세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젊은이들’ 같은 혐오의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MZ세대’ 자체가 정체불명의 말이라 귀 기울여 듣지는 않지만, 일부 중장년층에서는 그들끼리 통하는 언어가 되어온 듯하다.

그러나 세대의 틈새를 메우는 데 관심이 있는 나는 강의실 안에서라도 학생들의 목소리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이번 학기에도 다양한 전공이 모이는 교양학부 수업에서 40여명의 학생들과 한 학기를 보내며 묻고 또 물었다. 무엇이 20대 청년들을 괴롭히고 무엇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나? 학기말 토론에서 학생들이 털어놓은 속마음과 그들의 감정을 글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전달의 의무가 내게 있는 것 같다.

청년 남성들이 그토록 분노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군복무 중 20대 병사가 수해 실종자 수색작전에서 불행하게 생명을 잃었다. 사전에 계획된 일도 아니었고 안전장비도 없었지만 부대의 활동을 전시하려는 지휘부의 의도가 사건의 원인이 됐다. 그 정도 일로 최고지휘자가 처벌받아야 하느냐는 대통령의 격노로 수사가 방향을 잃었고 국회에서 통과된 진상규명을 위한 특검법도 거부됐다. 단지 한 명의 목숨을 잃었을 뿐인데 특검까지 해야 하나? 군대와 대통령실이라는 국가조직에서 개인의 존엄과 가치가 어떻게 부정되고 있는지 명확해졌다.

지난 주말에는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발간한 저널에 실린 황당한 글로 인터넷 커뮤니티가 시끌시끌했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줄어든 생산가능인구를 늘리기 위한 방편들을 제시한 글이다.

글 자체가 문제적인 데 더해 여성과 노인에 대한 억압적 정책이 보란 듯이 나열돼 있었다. 여성의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한 살 앞당기고, 결혼하지 않은 커플의 출산을 막으며, 정부가 청년 남녀의 만남을 주선해야 한다는 주장들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자, 개인의 결혼과 출산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억압이다. 그뿐이 아니다. ‘생산적이지 않은, 부양해야 할 고령층’을 줄이기 위해 ‘피부양인구의 인구유출정책’, 즉 노인들을 해외로 나가 살게 하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인생의 노년을 비생산적이라고 보는 낙인에 대응해 그동안 학계에서 ‘생산적 노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노년’에 관한 이론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는데, 이 무슨 낙인인가.

이제 한국 사회의 청년들은 국가 정책에 따라 5세 여아가 초등학교에 가고, 정부가 시키는 대로 이성을 만나 교제해야 하며, 때가 되면 법적인 결혼을 해서 ‘질 좋은 인구의 수’를 늘려야 한다. 비혼이나 동거는 국가가 허락하는 법률혼을 저해하므로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퇴직하면 스스로 알아서 짐을 싸고 저기 어딘가 먼 나라로 떠나가야 한다. 이 모두 국가의 생산가능인구를 늘리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윤석열 정부가 ‘자유’를 외칠 때마다, 나의 자유는 그만큼 더 줄어드는 것 같다. TV와 라디오에서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져왔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유주의 국가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나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청년들도 개인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학생들이 가장 싫다는 것이 ‘남과의 비교’였다. 무자비한 경쟁 압박 속에서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살아온 세대. 그들의 고통을 덜어줘야 할 책임이 있는 국가는 시종일관 귀를 닫고 명령할 뿐이다. 학교에 가라면 가고, 연애하라면 하고, 그러나 동거는 안 되며, 출산은 법적 신고 후에만 가능하다. 아이들이 적어 언젠가는 사라질 수도 있다는 국가 소멸 위험과의 전쟁에서 대체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가. 자유주의의 적(適)들이 도처에서 득실대고 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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