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가 지난해 발간한 ‘2022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2020년 한 해 동안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은 1만3195명에 달했다. 하루 평균 36명꼴로 스스로 삶의 끈을 놓았다는 얘기다.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은 24.1명(연령표준화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1위다. 2017년까지 리투아니아에 이어 2위였지만 2018년을 기점으로 1위에 오른 뒤 불명예의 자리에 계속 눌러앉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의 누군가 삶을 등지고 있을지 모른다.
얼마 전에는 전세사기 피해에 괴로워하던 젊은이가 극단적 선택을 하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던 아이돌 스타가 생을 마감했다는 안타까운 뉴스가 잇따랐다. 10대 여학생이 서울 강남의 한 빌딩에서 투신하면서 이 모습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실시간 생중계한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노동절인 지난 1일 한 노동자가 분신해 숨졌다. 양회동 민주노총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3지대장은 노조활동에 대한 검찰의 수사에 항의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검찰은 양 지대장과 지부 관계자들이 건설업체와 교섭한 내용을 문제 삼았다. 조합원의 채용과 노조 전임자 활동비 지급을 업체에 요구한 것을 ‘공갈’ ‘협박’으로 판단해 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은 영장실질심사를 하던 법원 앞에서였다.
양 지대장은 먹고살기 위해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열심히 살았는데 수사당국이 자신을 파렴치한으로 몰아간 것을 무척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메모에는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 “죄 없이 정당하게 노조활동을 했는데 (혐의가) 집시법 위반도 아니고 업무방해 및 공갈이랍니다.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네요.” 영장은 결국 기각됐다.
그를 극단적 선택으로 내몬 직접적 원인은 정부의 노조 탄압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노동을 3대 개혁과제 가운데 하나로 삼고 ‘건설노조’를 타깃으로 지목했다. 건설현장의 불법활동을 ‘건폭’으로 지칭하면서 이를 뿌리 뽑겠다고 공언했다. 전방위적인 압박이 시작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건설노조를 ‘경제에 기생하는 독’이라 했고, 윤희근 경찰청장은 건설현장 불법행위 근절을 ‘국민체감 3호 약속’으로 꼽았다. 건설노조 조합원은 ‘폭력배’와 동급이 됐다. 압수수색과 소환조사, 구속수사가 이어졌다.
현실을 무시한 처사였다. 당국이 불법으로 규정하는 채용 요구나 노조 전임비·월례비를 받는 행위는 사실 건설업계의 구조적인 문제다. 대다수 건설노조 조합원은 상시고용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채용 요구를 하지 않으면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다. 건설노조가 요구하는 노조 전임비도 마찬가지다. 건설현장의 특성상 이들은 노동부 장관 고시에 따라 보장받는 전임비를 챙길 수 없기에 노사 합의를 통해 정한 월 40시간에 해당하는 금액을 관행처럼 받는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법치주의’만을 앞세워 노조를 비리·부패집단으로 매도했고, 결국 한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다.
민주노총의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조합원 한 명이라도 더 나은 조건으로 고용할 수 있도록 투쟁한 것에 대해 파렴치한 공갈갈취범이라고 하는 것을 (양씨는)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경향신문 5월3일자 5면)
학업 스트레스나 가정불화, 경제적 문제, 직장 내 차별 등 극단적 시도를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하지만 그들이 어째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단어 몇 개로 단순하게 정리할 수는 없다. 당사자가 처한 현실과 입장, 그가 품었던 생각과 고민을 타자(他者)로서 정확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스스로 생을 내려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번민과 고통이 따랐을까’ 하고 짐작할 따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근 잇따르고 있는 극단적 선택은 그저 개인적 이유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갈수록 심화되는 경제적 격차와 함께 자원 분배 체계에서 소외되면서 생존 수단이 박탈당한 계층은 죽음의 유혹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대학 입시란 틀 속에서 경쟁에 내몰린 학생, 영세 중소상인과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들 역시 비슷한 처지에 내몰린다. 극단적 선택이 늘어나는 것은 사회구조적 부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들의 선택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한 것이 아닌, ‘사회적 타살’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