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제로, 그리고 재난의 ‘데자뷔’

2024.01.11 20:07 입력 2024.01.11 20:09 수정

비가 오든 눈이 내리든 상관없었다. 찜통 같은 더위 속에서,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걷고 또 걸었다. 삼보일배와 오체투지, 1인 시위 등을 이어가며 목소리를 냈다. 생업을 접은 지도 오래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지난 1년여간 ‘이태원 참사 특별법’ 제정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 하루아침에 희생된 생때같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단 한순간도 멈출 수 없었다. 이태원특별법이 사고 발생 후 15개월 만인 지난 9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방청석에서 지켜보던 유가족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특별법이 통과되는 것을 보면서 2022년 10월29일 밤을 떠올렸다. 늦은 시간 느닷없는 재난경보로 시작된 그날의 기억은 전대미문의 참사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충격과 함께 슬픔이 밀려왔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런 생각들이 분노의 감정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책임을 지닌 국가는 그때 없었다. 막을 수 있었던 참사였지만 맥없이 손을 놓았다. 사고 발생 전부터 이상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됐다. 통제되지 않은 거리는 축제를 즐기려는 인파로 터질 듯했다. 사고 발생 수시간 전부터 ‘압사사고가 우려된다’는 신고가 잇따랐다. 6호선 지하철 이태원역 무정차나 인근 도로 통제 등 간단한 조치만 취했더라도 150여명이 소중한 목숨을 허망하게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주무 장관이란 사람의 입에선 “그전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다”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한다”는 어이없는 변명만 나왔다. 놀라운 책임 회피다. 국가는 재난과 재해, 대형 참사를 예방할 의무를 지고 있다. 헌법 34조 6항을 보면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헌법 정신이다. 예측 가능한 재난을 막지 못했다면 국가에 법적 책임까지 물을 수 있다는 얘기다.

‘참사’가 아니라 ‘압사사고’라고 우기는 대목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역시 예상한 대로다. 제대로 된 사과나 추모도 없었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을 위로하기는커녕 ‘참사를 정쟁화시키는 불순한 집단’으로 몰고 갔다. 집권세력은 특별법 제정에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참사의 진상규명이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의 문제를 진보 대 보수의 갈등 구도로 바꿔놓아버렸다. 결국 이들은 표결에 불참했다.

이태원 참사 발생 후 1년여 동안 일어난 일련의 장면을 복기해보면 3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 때와 무척 닮아 있다. 부실한 선박 관리와 안전불감증은 항해 전 사고를 예고하고 있었다. 사태가 일어난 뒤 보여준 선장과 항해사의 판단 착오와 늑장 대응 역시 이태원 참사 때 우왕좌왕하는 당국자와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도 사고의 책임 소재를 가리고 진상규명을 하는 건 당연한 상식인데도 이 문제를 정쟁화하는 정부·여당의 대응은 놀랍게도 똑같다. 책임 회피에서 시작해 유족을 국민으로부터 분리하고 고립시키기 위해 진영싸움으로 몰아간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이태원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야당이 주도하는 조사위원회가 1년 반 동안 조사를 한다면 국론이 분열될 것”이라고 했다. 특별법은 아직 정식 공포, 시행되지도 않았고 특조위는 출범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딴지걸기다.

엊그제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단체 활동가 등이 참사 10주기를 앞두고 ‘세월호 기억공간’ 앞에 섰다. 시민들에게 ‘잊지 않고 함께 행동하기로 했던 마음을 다시 모아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10년이 흐른 지금도 왜 세월호가 침몰했는지, 아이들을 왜 제대로 구조하지 못했는지 답을 듣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온전한 진실과 완전한 책임규명, 진심 어린 사과다. 이런 것들이 해결돼야 참사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 ‘이태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집권세력은 ‘국론분열’ 운운하며 특별법을 시행하기도 전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대형 참사가 일어나면 정부가 책임 회피로 일관하다가 잘못 대응해 위기를 키우는 모습을 수차례 목격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스텝이 꼬이게 마련이다. 그런 전철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특별법의 원만한 시행과 철저한 조사가 뒤따라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도 말하지 않았는가. “국민은 무조건 옳다”고. 참사 유족 역시 똑같은 국민이다.

조홍민 사회에디터

조홍민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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