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꽃

2023.05.18 03:00 입력 2023.05.18 03:03 수정

모든 나무는 이주자이다. 운명에 따라, 혹은 유전자에 따라 씨앗은 바람에 날리거나 강물과 빗물을 따라 흘러간다. 단맛에 이끌린 짐승과 날짐승, 인간의 몸을 빌리기도 한다. 멀리 더 멀리 가려는 힘이 꺾이면, 뿌리를 내리고 몸을 펼쳐 잎을 틔운다.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나는 어미의 그늘에서 자라던 어린 은행나무였다. 네 할아버지가 나를 개울가로 옮겨 심었다. 그리고 30년 뒤에 네가 태어났다. 열 달 동안 너를 품은 태를 네 할머니가 개울물로 말갛게 씻었다. 볕이 잘 들고 사람 발길이 뜸한 곳에 묻었다. 한두 해 뒤에는 내 뿌리가 가닿을 만한 자리였다. 이제 막 꽃필 준비를 시작한 나는 그 모든 장면에 배경으로 서 있었다. 너와 나는 한 오라기 실낱의 인연인 줄만 알았다.

세 살 무렵 너는 열병을 앓았다. 지루한 봄 가뭄이 지속되던 나날이었다. 열에 들떠 네가 뒤척일 때, 나는 땅속 깊이 뻗은 뿌리로 식은땀 같은 시큼한 물기를 빨아들였으나, 갓 돋아난 잎의 가장자리는 남몰래 말라갔다. 때 이른 비바람에 밤새 시달린 날, 처음으로 뻗어 나왔던 튼실한 가지 몇 개를 잃었다. 며칠 뒤 잦은 경기 끝에 간신히 열병을 이겨낸 너는 걷지 못하는 아이가 되었다.

볕 좋고 바람 좋은 날이면, 할머니가 너를 업고 나왔다. 개울물로 얼굴을 말갛게 씻기고 점점 영역을 넓히는 내 그늘에 앉혀 두었다. 부산스럽게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뒹굴고 엎어지는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간 뒤였다. 홀로 할머니를 기다리다가 지치면, 너는 새삼 고개를 치켜들고 나를 바라보곤 했다.

‘나는 낮달 같은 존재예요. 떠 있는데 아무도 내가 거기 떠 있는지 몰라요.’ 나는 네 마음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밤에 누워서 동생들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내 얘긴 별로 할 게 없어요. 나는 귀만 있고 입은 없어요.”1)

가만히 서 있는 나와 가만히 앉아 있는 너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알지 못했다. 나무는 제자리에 서 있어도 온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었음을. 인간이 이토록 번성하기 이전, 지구가 온전히 식물의 터전이었을 때, 나무는 어디에나 존재했다. 어디라고 나누고 가를 수 없었다. 뿌리와 뿌리가, 가지와 가지가, 잎과 잎이 서로 얽혀 소통하고 조율했다. 팽팽하게 서로 묶이고 엉킨 생명의 그물망이 악기의 현을 튕기듯 밤낮으로 물과 공기를 휘젓고 일렁이게 했다. 기억과 대화로 연결된 우리는 온 세상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너는 아주 먼 곳으로 떠났고, 나무가 아니라 인간과 연결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네 슬픔과 기쁨이 선명할 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전동 휠체어를 타고 나섰던 날 바람에 머리가 날리는 것도 너무 좋았고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나가 비를 맞는 것도 너무 좋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서 너무 좋았고 내가 싸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서 너무 좋았고 싸우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배워서 너무 좋았다.”2)

은행나무는 까마득한 과거에서 온 이주자이다. 여러 차례 소멸과 생성을 목격하면서, 방어할 적도 사라졌으나 몸을 빌릴 공생자도 없는 존재다. 화려한 꽃도 달콤한 열매도 없이,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우리는, 오직 인간에게 기대어 살아남았다. 어느 봄날 포클레인이 들어와 개울을 메우고 내 뿌리를 흔들었다. 여기저기 붉고 흰 꽃들이 피어날 무렵이었다. 나 또한 꽃 아닌 꽃을 피울 채비를 했다. 내가 바람에 실려 보낼 수 있는 마지막 꽃가루일 것이다. 모든 나무는 이주자이다.

“이 비가 그치면, 시간은 다시 분열할 거야/ 폭포의 시간과 벌레의 시간/ 땀으로 정신은 빛나고, 울음 안에서/ 희미한 웃음이 자라나겠지/ 이제 아무도 우리를 통제하지 못할 거야.”3)

1), 2) <전사들의 노래>, 홍은전

3) <아름다움이라는 느린 화살>, 황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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