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산행

2023.04.20 03:00 입력 2023.04.20 03:02 수정

복잡한 심사를 가라앉히려는 산행이었다. 산길을 오르며 몸은 점점 무거워졌으나, 마음은 그만큼 무게를 덜었다. 그래도 해가 지기 시작했을 때 돌아서야 했다. 휴대폰 손전등을 켜는 순간에도 기회는 있었다. 저 아래 도시의 불빛이 훤히 보이는 자리였다. 왠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몸을 더 힘들게 하고 싶었다. 동네 뒷산이었고, 정상까지 돌계단이 이어지는 것도 알고 있었다.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오르는데 무엇인가가 눈앞으로 휙 지나갔다. 등골이 오싹했다. 불빛의 움직임 때문에 헛것을 본 것이겠지. 진정하고 다시 걸었다. 산이 깊어질수록 덤불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바스락 소리도 들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휴대폰 배터리가 다한 듯, 갑자기 손전등이 꺼졌다. 기다렸다는 듯 새카만 어둠이 주위를 짓눌렀다. 이제 헛것은 보이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가는 일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작정하고 다시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땀으로 몸이 흠뻑 젖었다.

‘언제부터인가 줄곧 존재했던 공포다. 어릴 때는 쉼 없이 전진하는 것으로 공포를 회피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1) 보이지 않는 손이 뒤통수를 향해 다가오는 듯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몸이 덜덜 떨렸다. 무서운 건지 추운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둠에 눈이 익자,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어이없는 거짓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런 사나운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런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말았어야 했어. 그런 간절한 부탁을 뿌리치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 말아야 했는데 저질러 버린 말과 행동의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아우성치면서 기억이 뒤쫓아 왔다. 허겁지겁 돌계단을 뛰어오르다가 갑자기 깨달았다. 하지 말아야 했던 언행의 기억이 바로 공포의 근원임을. 이제껏 내 힘으로 산에 오른 게 아니었다. 아우성의 힘이 나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내리막과 오르막이 번갈아 이어졌다. 오랜 시간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마침내 정상 부근에 이르렀다. 적요한 달빛 아래 큼지막한 바위가 검은 그림자로 눈에 들어왔다. 한기와 피로가 몰려왔다. 바위에 다가가 걸터앉으려는데 어디선가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쿵쿵거리며 올라오는 소리에 잠이 깼네. 땅을 어머니의 살처럼 소중히 여기라는 말을 들어는 봤나? 해월 선생은 어린아이가 나막신을 땅에 딱딱 부딪치며 지나갈 때 당신 가슴이 아프다고 했지.”

누군가가 바위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을 이었다.

“백일 동안 산에 올랐어. 산은 하늘과 땅과 인간이 만나는 곳이니까. 촛불을 켜고 맑은 물 한 사발 놓고 기도했지. 기름 반 종지로 이십일일 밤 동안 등불을 켰다는 기적2)을 체험하고자 했네. 물론 일 년 내내 어디든 전깃불을 밝힐 수 있는 시대에는 이미 기적이라 할 수도 없지만.”

그가 고개를 돌려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 도시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백일째 되는 날 바위에 쓰러져 잠들었어. 꿈을 꾸었는데, 촛불도 전깃불도 필요 없는 세상을 보았네. 느닷없이 하늘이 열리면서 빛으로 물들어가는 세상이었어. 그 뒤로 다시는 이곳에 촛불을 켜지 않았지. 그리고 무엇을 했는지 알아? 돌계단을 쌓았어. 자네가 딛고 올라 온 바로 그 계단 말이야. 꿈에서 본 빛의 세상을 마음에 간직하기 위해서였지.”

이마 위로 부서지는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바위를 베고 잠들었나 보다. 밤새 길을 잃고 헤맨 기억이 떠올랐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의외로 짧았다. 돌계단의 중간 지점이 산허리를 지나가는 순환도로로 끊어져 있었다. 차들이 달리는 도로의 갓길을 따라 내려오며 돌계단이 시작되는 부분이 어디쯤인지 가늠해 보았다.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1) <선산요양원>, 하오징팡

2) <해월 최시형과 동학 사상>, 부산예술문화대학 동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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