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속이 좋지 않구나

초등학교 6학년을 얼추 마쳤을 때 무슨 일인지 겨울방학도 하기 전에 학교에 가지 않았다. 놀다가 그랬는지, 아니면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선생님이 달필로 한자를 섞은 편지를 보내오셨다. 나는 곱은 손이 다 부르트도록 야산으로, 골목으로 쏘다녔을 것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부모님께. 저는 찬일이 담임 봉규석입니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고…. 비록 어려운 살림에…. 이렇게 편지를 보내니, 졸업식에 꼭 참석하도록 부탁드립니다….” 한 반 80여명 중에 전화 있는 집이 열도 안 될 때였던 것 같다. 개인 간 거래하는 백색 전화기가 집 한 채 값은 될 100만원쯤 할 때였으니까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우리집엔 당연히 전화가 없었다. 그리하여 선생님이 통지표를 함께 넣어 편지를 보내셨다. 혹시라도 머지않아 열릴 졸업식에 오지 않을까 걱정도 하셨던 거다. 어린 마음에도, ‘아, 선생님이 나를 기억해주시는구나’하는 생각에 작은 감동을 했던 게 생생하다.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한 말씀은 내가 이렇게 글이라도 써서 먹고살 방편을 마련해주는 길잡이였다. 우연히 들른 옆반 선생님께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가리키며 “찬일이가 아주 글을 잘 써요. 게다가 이 글씨 좀 보세요. 또박또박하고.” 나는 지금도 그 선생님의 친절한 눈빛과 표정을 기억한다. 선생님 성함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부끄러울 뿐이다.

나는 그때 공부도 1등이 아니었고, 환경미화할 때 화분을 가져올 형편도 아니었다. 어머니가 학교에 와 ‘인사’를 할 주제는 더욱 아니었다. 교실에 90여명의 아이들이 바글거리던 때였다. 2학기가 되어도 자기 학급 아이들 얼굴과 이름을 다 못 외우던 선생님도 있던 시절에, 따뜻한 그 선생님의 관심이 한 아이의 미래 밥줄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선생님은 나중에 어느 TV 광고에 나왔던, “얘야, 오늘은 내가 속이 좋지 않구나”의 그 사례였다.

선생님이 예쁜 모란꽃이 그려진 양은 도시락을 한 아이에게 내밀 때, 나는 차라리 우리집이 더 가난해서 끼니를 자주 거르기를, 점심 대신 운동장 수돗물을 먹는 아이이기를 바랐다. 부끄러움 따위보다 장조림과, 무엇보다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받아가는 아이이고 싶었을 것이다. 결핍이 오히려 자연스럽던 시대에 미담도 넘쳤다는 건 우리 기억의 왜곡일까.

물론 육성회비를 늦게 낸다고 매질을 하고, 겨우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들에게 차가운 마룻바닥에 ‘주먹 쥐고 엎드려뻗쳐’나 ‘원산폭격’을 시키던 담임선생님에게 어린 마음에도 분노에 몸을 떨기도 했다. 그래도 소금처럼 썩지 않는 선생님들이 더 많아서 우리나라가, 세상이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앞서 쓴 나의 선생님들이 그랬다.

부디 우리 학교가 더 밝아지기를, 서로 귀중함을 아는 학교가 되기를. 더불어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더 싸워야 한다는 걸 생각하게 된다. 당신의 도시락을 내주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건사하는 선생님들이 왜 많지 않겠는가. 그런 선생님을 기억하는 시간이, 아이들과 선생님 모두 아프지 않은 학교를 위해 우리가 더 싸워야 할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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