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의 옆집물리학] 그동안 감사했어요

2024년 정부 예산안에 따르면 과학기술 분야의 R&D 예산이 16.6% 줄어들게 된다. 산업 발전에 즉각적인 도움을 주기 어려운 순수기초과학 분야의 연구는 거의 대부분 기업이 아닌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다. 예산 삭감으로 가장 먼저 큰 타격을 받을 분야가 기초과학이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기초과학 분야 연구자가 연구계획서를 한국연구재단에 제출하면, 계획서의 내용을 심사할 같은 분야의 전문 연구자들이 심사자로 선정된다. 힉스 입자 이론 연구를 하겠다는 과제를 나와 같은 통계물리학 연구자가 제대로 심사할 수는 없다. 결국 통계물리학 분야 연구과제는 주로 통계물리학자가, 입자물리학 분야 연구과제는 주로 입자물리학자가 심사한다. 아니길 바라지만, 요즘엔 이런 것도 카르텔이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심사자들은 계획서를 익명으로 평가해 지원 대상 과제 선정에 도움을 준다. 지원 대상 과제로 선정되면 매년 연구비가 소속 대학에 입금되고, 미리 제출한 예산안에 따라 증빙 서류를 갖춰 연구비가 집행된다.

접수된 연구과제 중 얼마나 많은 과제가 선정되었는지, 그 비율을 과제 선정률이라 한다. 올해 과제 선정률은 이전보다 줄었다. 2023년 예산이 2022년 수준과 비슷하다는 게 알려졌을 때 예상한 일이다. 과거 한동안 늘어난 예산으로 신규과제 선정이 많았고, 이들 과제들은 앞으로도 몇년 예산이 계속 투입되므로 신규로 선정할 수 있는 과제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예산이 동결되어도 한동안 신규과제 선정률이 낮아지니,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 내년 선정률은 더 줄어든다. 게다가 탈락한 연구자가 이후 다시 지원하므로, 지원자 숫자는 누적적으로 늘어나 선정률은 더욱 낮아지게 된다. 2024년 과제 선정률은 올해보다도 훨씬 더 낮아질 게 분명하다. 만약 과제 선정률이 5~10% 정도라면, 연구를 하고자 하는 연구자 10~20명 중 1명만 연구비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교수의 삶을 시작한 이래로 20여년, 국가에서 지원하는 연구비를 못 받은 적은 없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컴퓨터 말고는 실험 장비가 딱히 필요 없는 이론물리학 분야에서 연구비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대학원생 인건비다. 국민이 주시는 소중한 돈이다. 정부 연구비에서 교수는 자신의 인건비를 어차피 지급받지 않으므로, 과제를 수주하지 못한 교수에게 학문적 타격은 있어도 경제적 타격은 없다. 대학원생은 다르다. 교수가 연구과제를 수주하지 못하면 대학원생의 생계가 어려워진다.

최소한 내가 속한 분야에 카르텔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백번 양보해 내가 모르는 카르텔이 있다 해도, 연구비 대폭 삭감으로 발생하는 피해는 정부에서 지목하는 카르텔 교수가 아니라 카르텔과 상관없는 대학원생에게 집중된다. 게다가 부모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대학원생이 첫 번째 피해자가 된다.

현재 지원받고 있는 과제는 내년 초에 종결된다. 요즘 고민이 많다. 나보다 의욕적이고 혁신적인 젊은 교수의 연구과제가 지원받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지, 그렇다면 이제 연구를 그만둘 시점이 마침내 내게 온 것이 아닐까 매일 고민한다. 연구비 수주의 전망이 어두워,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었던 학생에게는 다른 그룹으로 진학하는 것이 좋겠다고 알렸다. 교수들은 대학원생 받는 것을 이미 주저하기 시작했고, 정부 출연 연구소에서도 내년 비정규직 연구원 채용 규모를 이미 줄이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예산 삭감의 피해는 대학원 진학을 꿈꾸던 학부생, 현 대학원생, 그리고 비정규직 연구원에게 집중된다. 연구비 삭감으로 과학자를 꿈꾸는 젊은 연구자가 줄어들면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큰 장애가 생기고 결국 큰 피해는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국민 모두에게 돌아올 게 분명하다. “계속 과학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큰 욕심도 없이 과학을 그냥 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계속 그 길을 걷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말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일까?

그동안 연구를 재밌게 하면서 정말 행복했고, 하루하루 발전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큰 보람도 느꼈다. 딱히 세상에 어떤 경제적 도움이 될지 알 수 없고, 노벨상을 받을 리도 없는 부끄러운 연구를 20여년 지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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