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1980년대는 욕망의 시대였다. 경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옹호한 케인스주의가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을 거치면서 권위를 잃었고, 시장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는 시카고학파의 보수주의 경제학이 힘을 얻기 시작한 시기가 1980년대였다. ‘시장’과 ‘경쟁’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절대선이었고, 금융시장은 부를 좇는 원색적 욕망이 가장 적극적으로 투영되는 장이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1988년작 <월 스트리트>에 나오는 고든 게코는 당시의 시대정신을 제대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1980년대는 금융이 실물경제를 지배했다. 금융자본의 이해는 경영혁신이라는 외피로 기업에 관철됐다. ‘M&A’(인수·합병), ‘리스트럭처링’(restructuring·사업재조정), ‘다운사이징’(downsizing·구조조정) 등이 당시의 경영혁신을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세 단어는 병렬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체로 결론은 구조조정이었고, M&A나 리스트럭처링은 다운사이징을 위한 방법론이었다. 서로 다른 기업을 합친(M&A) 후 중복 영역을 구조조정하거나, 기업의 사업부를 분할(리스트럭처링)하는 과정에서 군살을 뺐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사모펀드와 월가 투자은행이 주도했고, 이들은 ‘기업사냥꾼’으로 불리기도 했다.
유서 깊은 소비재 회사 ‘RJR 나비스코’를 둘러싼 일련의 소동은 금융자본이 주도한 욕망의 1980년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RJR 나비스코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오레오와 리츠 등을 만드는 제과사업부와 살렘, 윈스턴 등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던 담배사업부로 이뤄진 회사였다. 1988년 이 회사는 금융자본의 공격을 받는다. 당시 최대 규모의 사모펀드였던 KKR이 적대적 M&A를 시도했고, 이에 맞서 RJR 나비스코의 CEO였던 로스 존슨은 MBO(Management Buy Out)로 맞섰다. MBO는 경영진이 회사의 자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 주주들로부터 지분을 사 경영권을 확보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KKR은 당대의 가장 공격적인 기업사냥꾼이었고, 존슨 또한 거대 기업의 CEO로서 가지고 있던 각종 특혜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탐욕적 인물이었다.
이 싸움의 결론은 KKR의 승리였지만, 그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했다. 기업 인수에 너무 큰 금액을 지출한 KKR은 만족스러운 수익을 못 얻었고, RJR 나비스코도 회사의 다양한 사업부가 분사되면서 궁극적으로 기업가치가 증대됐다고 보긴 어려웠다. 또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RJR 나비스코의 공장이 폐쇄된 지역은 급속히 쇠락했다. 월가의 주류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월스트리트저널’ 기자들조차 멀쩡한 기업 RJR 나비스코에 분탕질을 한 금융 전문가들을 야만인들이라며 경멸했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자였던 브라이언 버로와 존 헬리어가 공저한 역작 <문 앞의 야만인들(Barbarians at the gate)>은 1980년대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생생한 르포다.
지난 11월27일자 서울경제신문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일본에서 경영진이 회사를 인수해 상장폐지시키는 MBO가 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대형 제약사인 다이쇼제약이 역대 최대 규모인 7100억엔의 주식 매입을 발표했고, 교육업체인 베네세홀딩스도 내년 2월 초부터 자사 주식을 매입해 상장폐지를 추진할 예정이다. 일본에서 나타나고 있는 MBO는 경영자의 욕망이 분출했던 1980년대 RJR 나비스코 사례와는 결이 다르다. 일본 기업들은 주주행동주의자들의 경영 간섭이나 배당 확대 요구 등이 장기적 관점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주식을 사고파는 주식투자자들이 기업과 운명을 같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에 주식투자자들의 이해는 다분히 단기라는 시간 범주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기업 경영진이나 노동자들이 기업에 대해 가지는 이해관계는 보다 장기적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금리 인상이 우려될 때 투자자들은 주식을 팔아 기업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지만, 기업 운영에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는 경영자와 노동자들은 금리를 올리거나 말거나 일상적 경제활동을 멈출 수 없다. 일부 일본 기업들은 단기주의에 경도돼 있는 주식시장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MBO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MBO 자체보단 기업들이 어려움을 느낄 정도로 일본 상장사들에 가해지는 주식시장의 압력이 크다는 점이 더 인상적이다. 일본은 자본시장보다는 은행이 금융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역사를 오랫동안 지속해왔고, 은행과 기업들이 상호출자해 지분을 보유하면서 한 다리 건너면 이해관계를 공유하게 되는 관계 중심 자본주의를 견지해왔다. 주주행동주의나 시장 압력 등은 영미식 자본주의 국가의 금융시장에서나 듣는 말이었는데, 일본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의도된 결과이다. 10여년 전 아베 신조 총리의 2차 내각이 출범한 이후 시행된 아베노믹스는 ‘잃어버린 20년’으로 상징되는 정체된 일본 경제에 변화를 주기 위한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다. 주주들의 힘으로 무능력한 기업들이 가진 부를 순환시키고자 하는 국가적 프로젝트는 아베노믹스의 주식시장 버전이었다. 지난 4월 도쿄증권거래소가 주가가 장부가치를 밑도는 상장사들에 대해 주가 부양 계획을 밝히라고 요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장부가치를 하회하는 주가, 즉 PBR(주가순자산비율) 1배를 하회하는 기업들은 ‘과거는 창대했으나, 미래 걱정은 많은’ 경우가 많다. 과거엔 수익력이 뛰어났기에 큰 규모의 부(자기자본)를 쌓아놨지만, 미래에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약할 때 주가가 낮은 수준에서 형성돼 PBR은 1배를 밑돌게 된다.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갑자기 만들어낼 수는 없으니, 주가를 상승시키기 위해선 배당 형태로 과거 쌓아놓은 부를 주주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배당을 받은 주주들은 소비를 하거나, 더 생산적인 기업에 투자할 수 있다. 도쿄증권거래소는 기업들에 이런 행위를 강권한다. 최근의 일본 증시 강세는 과거 쌓아놓은 부를 순환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승이고, 이는 정책 효과에 기댄 바가 크다는 생각이다. 주주자본주의에 내재된 단기주의가 언젠가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출구가 없는 장기정체를 겪은 일본 경제 입장에서는 이를 기꺼이 치러야 할 비용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