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황량한 방송정책은 장차 무엇이 될까

폭풍전야 텅 빈 거리에 선 느낌이다. 지난 10년간 두 차례 정권변화를 겪으면서도 뭐 하나 잘된 것 없던 이 나라 방송정책이 갑자기 권력공백의 교차로에 팽개쳐진 모습이다. 대통령은 야당이 추진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을 국회로 돌려보냈고, 임박한 탄핵소추를 앞두고 방송통신위원장은 민활히 사퇴했다.

이 황량하고 적막한 오늘의 방송정책은 장차 무엇이 될까. 지금까지 누구도 겪지 못했던 새로운 수준의 나락을 예고하는 적막함인가, 아니면 어떤 극적인 반전을 앞둔 황량함인가. 흥해도 좋고 망해도 좋으니 (망해야 그나마 새롭게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구나), 다음 이 길만 피하면 좋겠다. 대통령은 더도 덜도 아닌 제2의 이동관을 찾아서 방송통신위원장 후보로 지명하고, 야권은 정부·여당이 수용하지 않을 게 자명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을 공들여 제시하고, 여야 모두 내년 총선을 계기로 새롭게 기회를 보자고 다짐하며 다시 힘겨루기에 들어가는 길 말이다. 이 길은 그냥 망하는 쪽보다 더 나쁘다.

정치적 기회주의, 이것이 이 나라 방송정책 근간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거룩한 이념과 그럴듯한 전망을 내세우며 개혁을 주장했건만, 누구도 제대로 이룩한 것 하나 없이 도금된 자리를 누리다 사라졌다. 매체역무에 정통한 전문가는 외면받고, 정책조율을 고민하는 중재자는 모함받는다. 지금 한 자리에서 누리거나 노리는 자들은 다 누구 캠프, 무슨 라인, 어디 쪽 사람으로 불릴 뿐이다. 이러니 누가 나와 무슨 말을 해도 서로 듣지 않고 비방하며 모략만 한다. 지금 방송정책의 꼴은 자유당 때요, 구한말이요, 무신정권 시절의 그것이다.

세계의 언론매체가 사정이 안 좋다지만 우리처럼 빠르게 쇠락하는 곳이 별로 없다. 세계의 공영방송이 정당성 위기를 겪는다지만 우리처럼 전면적으로 정치꾼들이 지배구조를 장악한 곳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나마 분투해 온 디지털 플랫폼은 지난 10년 기술혁신으로 세계로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각종 규제에 발목이 잡혀 국내용 기업으로 추락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에 혁신적인 디지털 매체역무를 제공하는 파괴적 기술기업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있다. 정책적으로 보면 이렇게 사연도 많고 과제도 많은 나라에서 이 정도로 아무 일도 못하기도 어렵다.

대통령에게 바란다. 부디 보수여권에서라도 인정받고 시민의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로 방송통신위원장을 지명하길 바란다. 한마디를 하더라도 진지하게 들을 만한 발언을 하는 인사였으면 좋겠다. 다시 제2의 누구라는 사람이 오면 온갖 풍파를 헤치고 임명되더라도 정치적으로 시달리다가 다시 탄핵이니 뭐니 하며 도돌이표에 몰린다. 야당도 마찬가지다.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이 무슨 싸움질을 하라고 만든 자리가 아니다. 전투력이 추천사유가 될 수 없다. 여당에서 쌈꾼이 오더라도 정책 전문성으로 지그시 대응할 수 있는 인사를 추천해야 마땅하다.

민주당에 바란다. 제발 정부·여당과 협의해 새로운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을 마련하라. 이미 누더기 상태인 현행 방송법을 시청각매체법으로 개편하자면, 여당은 물론 시민사회단체와도 사안별로 조율하며 주고받을 것들이 많다. 공영방송 수신료위원회 설치, 방송평가제도 개혁, 매체역무별 협약제도 도입,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개편, 역외 플랫폼 규제틀 개발 등 당면한 과제가 널려 있다. 모두 누구 캠프, 무슨 라인, 어디 쪽 사람들이 뛰고 있다고 의심받거나, 아니면 장차 그렇게 되더라도 놀랄 게 없는 단체로부터 공영방송 이사를 추천받는 일보다 백배천배 중요한 일들이다.

정책이란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고, 정치를 하다보면 정략적인 고려가 개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가 정략에 몰두한 나머지 10년이 넘게 두 번이나 정권을 바꾸어 집권하면서도 이런 교착 상태를 지속할 뿐이라면 정책이고 뭐고 다 소용없는 짓일 뿐이다. 제발 대국적으로 정치하기 바란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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