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기요마사와 토란

임진왜란과 이순신을 그린 3부작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가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명량>에서부터 <한산>을 거쳐 <노량>까지, 이순신의 노정과 충정의 완결편이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전란인 임진왜란을 생각하면, 마치 한 사람(이순신)이 한 나라(일본)를 대적해 싸운 전쟁처럼 기억된다. 전쟁 내내 주요 전투를 지휘했던 이순신의 존재와 업적이 그만큼 위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군 중에는 가토 기요마사를 빼놓을 수 없다. 가토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선봉에 섰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대마도와 부산을 거쳐 보름 만에 한양에 도달했다. 그 후 북진을 거듭해 함경도와 두만강을 넘어 여진족 구역까지 진격하였다. 함경도와 남해 등 중첩되는 지역이 일부 있었지만, 이순신과 가토가 직접 부딪치진 않았다.

도요토미의 명령을 받아 귀환했던 가토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재차 조선을 침략하여 전라도와 경상도에 주둔했다.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곽재우에게 패한 그는 울산에서 성을 쌓고 버텼다. 울산성에서 조·명연합군에게 포위되었던 그는 식량과 식수 부족으로 갖은 고초를 겪다 가까스로 탈출했다.

전란 후 일본으로 돌아간 가토는 구마모토 초대 번주가 되었다. 그는 울산성에서 겪었던 처절한 경험을 살려, 일본 3대 명성(名城) 중 하나인 구마모토성을 축조했다. 성을 지을 때, 그는 장기전에 대비해 기묘하고 독특한 방법을 총동원했다. 성내 여러 곳에 우물을 팠으며, 바닥에 깐 다다미의 심은 짚 대신 토란 줄기를 사용했다. 비상시 말린 토란 줄기가 병사의 식량이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벽에는 말린 박고지까지 집어넣었다. 울산성에서의 벼랑 끝 위기가 깊이 각인되었던 모양이다. 해자에 심었던 연도 연근을 먹기 위해서였다. 또한 구마모토성을 ‘긴난성(銀杏城: 은행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성 주변에 식용할 수 있는 은행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일종의 ‘비상식량’으로 만든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토의 구마모토 축성 기술을 보며, 이어령 선생이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언급한 도시락 문화가 떠오른다. 밥상의 여러 음식을 작은 상자에 줄여 넣는 ‘벤또’ 문화. 일본 특유의 채워넣기(つめる, 쓰메루) 문화의 기능적 구조 원류를 구마모토성에서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오늘 아침, 아내가 끓여준 육개장 속의 토란 줄기를 보며 400여년 전의 전란을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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