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신정국가로 가나

2024.03.03 20:02 입력 2024.03.03 20:03 수정

난임 시술을 받는 지인들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소감은 “우리나라가 왜 저출생 국가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난임 병원에 다니는 동안 첫째 또는 둘째 아이를 갖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찬 여성들을 워낙 많이 봐서 하는 소리다. 이들은 시술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불편과 고통, 좌절을 감내하면서 난임 시술을 되풀이한다. 아기를 원하지만 자연임신이 어려운 여성에게 의학적 해결책은 이것 하나이기 때문이다.

난임 여성이 느끼는 간절함과 고통은 미국 앨라배마주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앨라배마주의 난임 여성들은 결정적인 난관을 하나 더 만났는데, 앞으로 주내에서 난임 시술을 받지 못하거나 받더라도 더 비싼 비용을 치러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2월16일 앨라배마주 대법원이 ‘동결배아는 자궁 외 어린이이며 이를 폐기하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한 후 대형병원인 앨라배마대학병원을 필두로 난임 치료를 잠정 중단하는 병원이 속출하고 있어서다.

현재 난임 병원에선 여성에게 배란 유도 주사를 놓아 다수의 난자를 채취한 뒤 체외 인공수정을 통해 배아를 만든다. 병원은 자궁에 이식하고 남은 배아를 동결했다가 임신에 실패하면 다음 시술 때 사용하고, 임신에 성공하면 폐기한다. 유전적 결함이 있는 등 이식하기 부적합한 배아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배아 폐기가 민감한 법적 쟁점이 되면서 앨라배마주에서 난임 시술이 위축될 가능성이 커졌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앨라배마주를 떠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여성들이 산부인과에서 진료받을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앨라배마주는 2000년 이후 병원 14곳이 문을 닫아 여성들이 산전 진료 예약을 잡기 어렵고, 산모사망률도 미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으로 이미 악명이 높다.

미국 언론에선 이번 판결이 나온 것에 대해 2022년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보장한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례를 뒤집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고 본다. 오랜 세월 미국의 낙태 반대론자들은 배아 단계부터 인격을 부여하는 전략을 통해 임신과 관련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부정하고자 했다. 이번 판결은 미국 사법 역사상 처음으로 배아를 ‘어린이’라고 부르면서 배아에 인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언론은 ‘어린이’를 폐기하지 않고 동결만 하는 건 괜찮은 일인지, 동결배아를 보관한 냉동 탱크는 그럼 냉동 어린이집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를 되묻고 있다. 앨라배마주 대법원의 판결이 비과학적이고 터무니없다는 얘기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찰스 블로는 이런 비판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번 판결이 미국이 신권정치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사실에 입각해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법원마저 과학과 이성이 아닌 성경과 교리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톰 파커 앨라배마주 대법원장은 판결문 보충의견에 “모든 인간의 생명은 출생 이전에도 신의 형상을 품고 있으며, 신의 영광을 지우지 않고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할 수 없다. 인간의 생명을 부당하게 파괴한다면 신의 분노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썼다. 판결문인지 신앙고백인지 모를 글이다.

더 큰 문제는 여성 등 비주류와 약자의 몸을 두고 보수 세력이 벌이는 ‘십자군 전쟁’이 난임 시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선에서 펼쳐지리라는 것이다. 비영리단체인 미국시민자유연맹은 성소수자의 권리를 제약하거나 부정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 437개가 전국 각지의 주의회에서 검토 중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앨라배마주 대법원이 중세로 퇴행하는 동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무패 가도를 달리면서 오는 11월 미 대선은 2020년 대선의 재판이 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트럼프는 자신이 대통령 재임 기간 연방대법원을 ‘6 대 3’ 보수 우위로 바꾼 덕분에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폐기할 수 있었다고 자화자찬하는 인물이다. 트럼프는 연방법으로 임신 16주 이후 낙태를 금지하는 방안에도 찬성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방법이 ‘16주 이후’를 못 박는다면 각 주는 이보다 더 엄격하고 보수적인 주법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가 당선되면 여성들에게 더 많은 제약이 가해질 것으로 우려된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신의 이름으로 여성의 몸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국가라면, 미국이 신정국가가 되고 있다는 언론의 진단이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최희진 국제부장

최희진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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