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키 소위와 시게미쓰 오장

2004.08.19 18:31

〈진중권/문화비평가〉

소설가 이문열이 어느 신문에서 ‘겐페이 고초’(憲兵 伍長) 얘기를 할 때만 해도 그게 무슨 얘기인지 몰랐다. 어느 방송에 나가 토론할 때의 일이다. 반대 쪽 패널이 “진짜 악질은 하사관 이하에 많은데 왜 조사대상을 소위 이상으로 했느냐”고 따지고 들기에, 이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게 어찌 친일진상규명에 반대하는 논거가 된단 말인가? 그래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던 기억이 난다. “원하신다면 하사관까지 함께 조사합시다.”

친일진상규명에 반대하는 이들이 외려 조사대상을 더 넓게 잡자는 이유는 뭘까? 여당 당의장 부친의 친일행각이 언론에 보도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심오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신기남 의장의 부친이 일제 때 ‘겐페이 고초’였단다. 이 뉴스를 접하고 실은 박장대소를 했다. ‘오장’이라는 일본식 낱말의 뉘앙스가 우스웠기 때문이다. 친일을 해도 격조가 있게 할 일이지, 고작 오장이 뭐냐, 오장이….

-치고받는 여야의 요지경-

나의 폭소는 두 세력을 향한 것이었다. 하나는 여당의 3류 사무라이 짓이다. 과거사를 청산하겠다며 보기 좋게 칼을 빼든 여당. 칼날이 번득이며 허공을 가르자, 하늘에서 뭔가 떨어진다. 근데 이 사무라이가 벤 것은 제 자신의 목이었다. 게다가 지금 분위기를 보니, 여당은 남을 베기 전에 그 칼로 자신의 배부터 갈라야 할 판이다.

또 하나는 야당의 물귀신 짓이다. “친일은 소위만 했나, 오장도 했다.” 이게 한나라당이 역사문제에 접근하는 관점이다. 누가 뭐래? 정 원한다면 오장까지 다 조사하면 될 일이다. 아마도 옛날 같았으면 이 물귀신 작전이 먹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잘못 걸렸다. 대통령이 어떤 분인가? 툭하면 대통령의 직을 걸고, 정권의 명운을 거는 도박꾼이다. 치킨게임을 해도 절대로 먼저 물러나지 않는 승부꾼이다. 울면서 당 대표를 베고서라도 제 할 일은 하고야 마는 성질이다.

우습기는 보수언론도 한 가지. 관동군 소위를 조사대상에 넣었더니 “야당을 음해하는 음모”란다. 그럼 그 사람은 뺄 수도 있다고 했더니, “제멋대로 넣었다 뺐다 하는 것으로 보아 조사 자체가 정치적”이란다. 관동군 소위의 친일행각을 밝히자고 하면 “겐페이 고초는 왜 빼냐”고 따진다. 오장의 친일행각도 조사하자고 하면 뭐라고 할까? 조선일보의 반응이다. “아군 희생 딛고 가자 과거사로. 목표에 모든 걸 거는 노대통령 정치. 위기마다 정대철, 안희정 등 측근 제물 돼.”

가요계에 ‘하사와 병장’이 있다면, 친일계에는 ‘소위와 오장’이 있다. 몇 달 전에 신기남 의장은 박근혜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소위와 오장’의 끈끈한 우애를 자랑한 바 있다. “제 선친과 박전대통령은 대구사범 동기동창입니다. 박전대통령이 결혼할 때 선친이 청첩인 역할을 해 청첩장에 선친 이름이 인쇄돼 있습니다.” 그 끈끈한 우정으로 두 분이 함께 역사적 심판대에 오르셨으니, 두 가문의 기쁨이요, 온 민족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과거청산은 시민의 요구-

같은 학교를 나와 끈끈한 우정을 자랑하던 다카기 소위와 시게미쓰 오장은 해방 후 180도로 다른 길을 걷는다. 소위는 남로당 군책을 하고, 오장은 빨치산 토벌을 했다. 최근 박대표는 과거청산에 동의하며, 해방 후 친북용공 활동을 했던 사람들도 함께 조사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갑자기 아버지의 해방 후 행각이 궁금해진 모양이다.

동병상련일까? 박대표가 사퇴한 신의장을 위로한다. 싸움을 하든 위로를 하든, 그들끼리 하게 내버려두자. 시민사회는 이번 일을 역사를 바로잡는 확실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과거청산은 정치적 문제이기 이전에 시민사회의 요구다. 덮어둬야 할 다카기 가문이나 시게미쓰 가문의 가족사가 아니라, 드러내어 바로잡아야 할 온 민족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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