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청문회로부터

2016.09.18 20:54 입력 2016.09.18 20:57 수정
한상희 |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일주일 전 국회에서 백남기 청문회가 열렸다. 백남기 농민이 직사되는 물대포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지 304일이 지났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물리력을 사용해 국민의 한 사람이 생사의 기로에 섰다. 그런데도 진상규명이 304일 만에, 그것도 경찰이나 검찰이 아니라 국회에서 이루어졌다.

[정동칼럼]백남기 청문회로부터

물론 그들은 잡아떼기에 급급했다. 경고살수와 곡사살수를 먼저 하라는 매뉴얼도 어긴 채 다짜고짜 치명적인 직사살수를 했고, 결과보고서는 거짓말로 조작했다. 살수차 운용 경관은 현장경험이 전무한 초보자였고, 사람이 안 다치게 좌우로 왕복 살수했다는 진술에도 불구하고 청문회장의 동영상은 마치 게임하듯 사람을 따라가며 조준살수했음을 보여주었다. 지휘부도 엉망이기는 마찬가지여서 살수 명령이 어떤 계통으로 하달되었는지 분명치 않고, 사람이 다쳐 긴급 이송됐음에도 지휘관은 텔레비전 자막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들은 애초부터 집회 참가자들을 적으로 간주했다. 집회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라는 사실은 안중에 없었다. 대규모 대중집회가 길거리 정치를 일구어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다. 되레 집회 참가자를 적으로 간주하며 진압일변도의 무력 행사로만 일관한다. 지휘관들은 오로지 청와대의 안전에, 그래서 자신들의 안전에 목을 매며, 현장의 경찰 간부들은 승진의 로열로드를 기대하며 그 위험한 진압명령에 무조건 복종한다. 그리고 결과보고서는 이런저런 가식으로 그저 보시기에 좋게만 만들어진다.

명백한 국가폭력이자 어김없는 국가범죄다. 그럼에도 그들은 잡아뗀다. 백남기 농민 사건 직후 살수차를 운용한 두 경관과 현장지휘자 등에 대한 내부 감찰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생생한 현장진술이 담겼을 최초 진술서는 야당 의원들의 강력한 요구에도 여당과 경찰의 입맞춤을 타고 아예 청문회장에 제출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숨겨진 진실을 타고 그저 잡아떼기만 했다. 아니, 대통령의 정책실패에 항의하며 10만명이 넘는 시민들을 향해 불법집회니 폭력행사니 하면서 책임전가에 급급했다. 그리고 청문회는 끝났다. 백남기 농민은 여전히 병실에 누워있고 가족들은 어제처럼 오늘도 항의시위를 이어가고 청문회가 일구어낸 진실들은 지진 소식에, 추석 교통 상황 소식에 가려져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다. 그렇게 그들은 잡아뗐고, 청문회는 이제 비굴한 경찰의 자화상이 되어 유령처럼 세상을 배회한다.

무관심은 이렇게 강요된다. 세월호가 그랬고 강남역에서 구의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홍만표에서 우병우를 거쳐 청와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무관심의 대상으로 떠밀린다. 수전 손택의 관음증적인 향락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은 ‘나는 그런 일을 겪지 않을 것이고 나는 아프지도 죽지도 않고 전쟁터에 있지도 않다’며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우리를 가리킨다. 그 원인은 무력감과 공포다.

그들은 끊임없이 무력감과 공포를 양산한다. 경찰의 감찰도, 검찰의 수사도, 심지어 국회의 청문회조차 무위로 돌리는 그들의 막가파식 권력, 변명은커녕 사과조차 거부하는 그들의 저열함, 10만 인파가 모여 외쳐도 그저 ‘불법집회’ 타령만 하는 그들의 무도함, 그것들로 인해서 우리는 권력을 두려워하며 진실을 외면하게 하며, ‘우리’란 누구이며 ‘그들’이란 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빠져든다. 어떤 사건, 어떤 비리에도 금방 지루해하고 냉소적이고 무감각하도록 떠미는 것이다. 그래서 파멸의 핵실험을 자행하는 김정은이 합리적이라는 뉴욕타임스식의 의미에서 대중들을 향한 이런 심리정치를 자행하는 그들 또한 합리적이다. 그 위선됨, 비굴함, 그리고 권력을 향해 털끝까지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그 뻔뻔함이 극도의 합리성을 가진다는 말이다.

구한말의 선교사 헐버트는 한국사람이 합리적 이상주의자라 평했다지만, 어쩌면 그것은 지금 같은 왕실의 극악한 무능과 부패로 인한 무력감과 공포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세월호나 백남기 농민을 보며 연민의 시선을 보냈던 것은 우리의 무능함을 자인하는 행위에 불과할 수도 있다. 정말 필요한 것은 분노에 찬 행동임에도 만사에 문제없다고 강변하는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무뇌의 인간처럼 생각하기를 멈추어야 하는 우리의 무능함 말이다.

그러기에 9·11 테러에도 그저 가만있으라, 견뎌달라는 말밖에 듣지 못하는 미국 국민들을 두고 손택은 이렇게 충고한다.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그것은 어쩌면 백남기 청문회를 되돌려 보는 우리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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