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여, 국민만 보고 나아가라

2018.08.12 20:53 입력 2018.08.12 22:26 수정
임지봉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오는 9월1일은 헌법재판소 창립 30주년이다. 지난 30년 동안 헌재는 1600건이 넘는 위헌성 결정을 내렸다. 국회가 만든 법률을 위헌결정으로 무효화시켰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정부의 각종 공권력 행사를 헌법소원 인용결정을 통해 취소했다. 1962년부터 1972년 유신정권 이전까지 약 10년 동안 헌법재판을 담당하면서 단 한 건의 위헌결정만을 내렸던 대법원이나, 유신정권과 제5공 정권을 거치는 15년 동안 단 한 건의 위헌심사조차 하지 않은 헌법위원회와는 비교 자체를 불허하는 수치다. 이런 헌재에 국민들은 뜨거운 박수와 폭증하는 사건 접수로 화답했다. 30년간 헌재에는 약 3만5000건의 사건들이 접수됐고, 그중 3만4000건가량의 사건들이 처리됐다. 1년에 평균 1000여건의 사건들이 접수됐고 헌재는 가능한 한 많은 사건들을 처리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 열심히 하는 헌재로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될 수 있었던 이유다.

[정동칼럼]헌재여, 국민만 보고 나아가라

헌재의 시작은 미약했다. 처음에는 서울 정동빌딩의 옛 헌법위원회 사무실에 둥지를 텄다. 상임 헌법재판관 5명이 책상을 맞대고 앉아 한 방을 썼다. 정상 업무가 불가능한 공간이었다. 그해 12월에 구 농협중앙회 건물이었던 을지로 청사로 옮겨 갔다가 지금의 안국역 부근 재동 청사로 이전한 것은 1993년 6월11일이 되어서였다. 처음에는 임명장을 받아든 9명의 헌법재판관 중 6명만 상임재판관이었다. 비상임재판관 3명은 회의가 있는 날만 헌재로 출근했다. 온전한 9명의 상임재판관 체제를 갖춘 것은 1991년 11월30일의 헌법재판소법 개정 이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열악한 환경하에서도 헌재는 예전의 헌법위원회나 대법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헌재가 세워진 지 다섯 달도 채 안된 1989년 1월25일에 당당히 첫 위헌결정을 선고한다. 재산권 청구에 관한 소송에서 국가가 채무자 겸 피고가 됐을 때, 다른 일반 국민과는 달리 국가에 대해서는 가집행 선고를 할 수 없게 했던 특례법 규정을 위헌이라고 판시했다. 국가가 국민과 대등한 사경제적 주체로서 활동하는 경우에까지 국가를 우대하는 것은 평등조항 위반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첫 위헌결정부터 국가의 삐뚤어진 기득권 조항에 경고음을 울리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려 한 것이다.

그 제1기 헌법재판소를 필두로 제2기, 제3기, 제4기, 그리고 이번 9월에 임기가 끝나는 제5기 헌법재판소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헌재의 사법적극주의적 경향은 큰 변화 없이 면면히 이어졌다. 헌재는 여러 전향적인 위헌성 결정들을 통해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현실 속에서 실현해내고 헌법 해석에 시대의 변화를 반영해왔다. 예를 들어, 동성동본금혼규정 헌법불합치결정에서 헌재는 최소 고려 중기 이후 수백년을 우리 사회의 관습으로 이어져온 동성동본금혼제도를 사실상 폐지시키면서 남녀동등권과 혼인의 자유 등을 강조하였다. 직계비속 남자를 통해서만 승계되는 유교주의적 호주제도를 규정했던 민법조항에 대해 남녀평등권 위반 등을 이유로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려 호주제 폐지의 민법 개정을 이끌어낸 것도 헌재였다. 헌재는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 선거구 간 선거인 수의 불균형이 2대 1의 기준으로까지 낮아진 것도 평등선거원칙상의 표의 등가성을 내세운 헌재 덕분이었다. 선거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투표한 것을 후보의 소속 정당에 대한 지지의사로 의제해 비례대표의석을 배분하도록 했던 선거법 규정을 민주주의 원리나 직접선거 및 평등선거의 원칙 등에 위반된다며 폐지시킨 것도 헌재였다. 최고권력자인 대통령도 국민의 신임을 배신하여 중대한 위헌·위법행위를 했다면 파면된다고 탄핵인용결정을 내린 것도 헌재였다. 헌법의 권력통제규범으로서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되던 순간들이었다.

물론 오랜 비판의 대상이 돼오고 있는 헌재 결정들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을 통한 수도 이전을 ‘관습헌법’ 위반이라는 취약한 근거를 통해 위헌으로 선언한 헌재결정, 선거를 통한 국민의 선택을 기다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의 ‘숨은 목적’이나 ‘주도세력’이라는 박약한 근거를 내세워 정당해산을 강행한 결정 등은 아직도 많은 헌법학자들의 논문에 비판대상으로 오르내린다.

현실권력은 여러 이유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려는 강한 경향성을 가진다. 앞으로의 헌재 30년이 권력으로부터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내는 데 있어서, 지난 30년보다 더더욱 매진하는 세월이기를 빈다. 헌재여, 국민들만 보고 나아가라. 그런 헌재는 국민들이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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