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사회를 향한 ‘불편’한 논쟁

2019.08.22 20:57 입력 2019.08.22 20:59 수정

어떤 발화나 이미지가 (방아쇠를 당기듯이) 폭력의 경험, 특히 성폭력, 인종차별, 전쟁 등과 관련된 트라우마의 기억을 촉발하고 심리적 동요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경고를 영미권에서 ‘트리거(방아쇠) 경고’(trigger warning)라 한다. 대략 ‘사전 경고’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동칼럼]‘안전’한 사회를 향한 ‘불편’한 논쟁

2010년대 들어 미국의 대학에서는 학내에서 ‘안전한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자유주의적 옹호의 파생물인 ‘안전한 공간’은 혐오에 따른 차별, 공격적 언사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공간으로 학내를 정화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경험의 주관성과 논쟁적 사유의 정치성을 고려하면, 학내에서조차 안전이라는 이념이 쉽게 현실화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국내에서도 여러 교수자들이 강의 내용에 논쟁적 요소가 있을 수 있으며 그로써 불편이 초래될 수 있음을 강의계획서에 명시하거나 수업 중에 예고하는 ‘사전 경고’를 활용한다. ‘사전 경고’는 주관적 경험과 공적 담론의 필요성 사이에서 논의의 균형을 찾기 위한 도구이다. 하지만 역으로 교실이 ‘안전’하지 않은 공간일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교실의 ‘불안전’은 대체 어디서 초래되는 것이며, ‘안전한’ 교실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안전’에 치중하는 교육은 학생들을 지적 유아상태, 정치적 진공상태에 머물게 하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봉쇄하며 피해자의식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논쟁적 주제에 대한 접근에 신중한 태도는 필요하지만 누군가는 폭력에 대한 논쟁 자체를 일종의 폭력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곤혹스러운 사실은 이 문제를 오늘의 교육현장에서 가장 어려운 현안 중 하나로 만든다.

최근 광주의 한 중학교에서 성평등 수업을 실시한 도덕교사가 성비위를 저지른 것으로 여겨져 직위해제됐다는 소식은 교권, 책임, 교수법, 학생들의 정서와 연령별 수용능력 등에 대한 논란을 야기했다. ‘사전 경고’ 및 ‘안전한 공간’을 둘러싸고 계속되는 대학 내의 논란을 중등교육에 직접 대입할 수는 없으나, 민감한 주제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과 그 방식에 대한 고찰이라는 점에서 두 상황은 공통점이 있다.

해당 수업에서 교사는 프랑스 단편영화 <억압받는 다수>를 상영했다. 이 영화는 여성이 경험하는 성불평등을 남성이 경험하는 것으로 뒤바꿔 낯설게 재연함으로써 일상화된 성불평등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는 학생의 민원에, 광주시교육청은 영화의 ‘선정적’ 영상과 충격적 대사 등이 부적절했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교육청은 교사의 일부 발언의 부적절성을 문제 삼았으나, 어떤 발언이 어떤 맥락에서 문제가 되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학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교육은 이뤄질 수 없다. 해당 수업에 문제를 제기한 학생들이 과민하거나 편협했을 거라고 쉽게 단정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다수의 학생들이 교사의 의도와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고려는 필수적이다. 다만 학생의 어려움을 감안하면서도, 불편할 수도 있는 주제가 엄연한 현실의 일부라는 사실과 그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감행해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성적 수치심’을 주요 판단근거로 삼는 우리 사회의 성폭력법은 성폭력의 개념 자체를 문제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학생들의 문제제기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사항에 대해 이루어졌는지를 면밀히 따져야 한다. 통념에 대한 문제제기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의 심리적 장벽이 문제였는지, 교사가 실제로 성평등의 원칙에서 어긋나는 비교육적 언사로 수업을 운용했는지를 구별하는 일은 중요하다. 교수법상의 난점을 성비위로 처벌하는 일이 생긴다면 성평등 교육의 가능성 자체를 축소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개인적 경험을 보편적 가치에 비추어 객관화하는 노력, 사적 감정과 현실 사이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관계를 이해하는 시도는 교육기관이 제공해야 하는 지적인 훈련의 핵심이다. 바로 그 점에 대해 교사, 교육기관, 감독기관, 사회가 함께 토론해야 한다. ‘안전한 공간’의 일차원적 유지는 자유로운 의사 교환과 사유의 확장을 저해하며, 사회와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을 방해하는 반지성주의를 부추길 뿐이다. 성, 젠더, 인종, 이주민, 계급 등 다양한 차원에서 차별이 공공연히 구조화된 우리 사회에서 인권과 평등의 가치가 정착하도록 교육하는 일은 계속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한다. 불편한 논쟁의 집요한 지속이 결국 우리 사회를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기본적 요건이라는 사실을 학생들 수준에 맞게 가르치는 일을 앞으로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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