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노부유키의 저주

2015.11.09 21:22 입력 2015.11.09 21:24 수정
조호연 논설위원

다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우려한다. 나는 언어 오염이 걱정된다. 올바른 교과서. 박근혜 정부가 이렇게 이름 짓는 순간 ‘올바르다’는 단어는 본디 뜻을 잃었다. 교과서는 옳고 바르다는 수식을 할 수 없다. 올바르거나 올바르지 않은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올바른 사과, 올바른 돼지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정부는 국정화가 함축하는 부정적 이미지를 피해 가려고 분열적 언어를 동원했다. 올바른 교과서는 그렇지 못한 교과서의 존재를 전제로 하며, 이 교과서는 없애야 할 목표가 된다. 그러나 현행 검인정 교과서의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이 국정화의 명분이 될 수는 없다. 둘은 별개의 사안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민 통합이 아니라 분열로 정치적 이득을 구하려는 특유의 시도를 또다시 되풀이하고 있다.

[경향의 눈]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

언어 오염의 위험성은 비민주적 속성에 있다. 기획자가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는 언어를 독점한 채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사람과 다른 생각을 존중하는 다원성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는다. 개인 사이에도 한 사람의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런데도 정권 차원에서 국민을 윽박지르고, 따라오지 않으면 좌파, 친북으로 몰고 간다. 국정화에 반대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는 해괴한 논리도 등장했다. 개인 영역의 문제인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역사관도 이 정권은 국민 전체가 하나의 것만 가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 같은 집단화, 일체화는 1970년대 유신독재의 구호다. 한국의 역사는 21세기에서 20세기로 퇴행할 위기에 처했다.

정치인이 주도하는 언어 오염은 콤플렉스의 산물이다. 불의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은 민주주의와 정의가 절실했다. 그가 정당을 만들고 민주정의당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그 같은 의도에서다. 독재자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자유당과 공화당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인이 자신에게 없거나 필요한 것을 ‘위장복’을 입어서라도 보충하려는 것이다. 언어 오염의 결과는 심각하다. 그것이 우리의 삶과 정신을 강제하고 규율하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교과서 파문의 본질은 친일반민족행위 지우기이다. 박 정권이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의미를 ‘건국’으로 격상하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헌법 전문을 배격하는 반헌법적 발상이다.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된 것이라면 일제 시절의 항일운동은 대한민국 이전의 역사가 된다.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의 목숨 건 항일 투쟁은 나라와 무관한 한낱 개인의 항거로 저평가될 터이다. 더 무서운 것은 친일파의 반민족성격마저 퇴색될 것이라는 점이다. 나라가 없는데 항일이나 친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독립운동과 임시정부가 정권에 의해 부정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렇다면 뉴라이트의 말처럼 김구 선생은 테러리스트가 될 판이다. 일제 앞잡이 경찰로 많은 독립운동가를 고문해 숨지게 한 노덕술은 건국공로자로 둔갑할 것이다. 민족과 반민족, 정의와 불의의 구분이 모호해질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고위관료와 새누리당, 재벌, 보수층에는 친일파 후손이 많다. 그들에게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조상의 친일 행각을 지울 절호의 기회이다. 친일파 후손이라는 일생의 멍에를 벗고 팔다리 쭉 펴고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국정화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들이 반민주, 반헌법, 반역사, 불법, 다수 국민 반대, 국정 운영 등 어떤 것이든 희생시켜도 좋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개인의 불편한 과거를 세탁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마저 “역사는 절대로 정권이 재단해선 안된다”던 과거 발언을 부정하는 것이란 비판이 쏟아지지만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한국의 이 같은 희극적 상황이 전개될 것을 70년 전에 내다본 사람이 있다. 마지막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이다. 그는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뒤 “우리 일본은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조선인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라는 섬뜩한 저주의 말을 남겼다(이상각 <1910년, 그들이 왔다>). 역사는 성찰하는 거울이다.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 나치 희생자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모든 독일 국민은 일어설 수 있었다. 국가든 정권이든 역사를 지우는 게 아니라 직시하고 참회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책임지지 않으려고 역사를 덧칠하는 나쁜 사례를 우리는 일본 아베 정권에서 본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아베 정권을 따라가고 있다. 언어를 오염시키며 세상을 이간질하고 뒤흔들고 있다.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를 현실화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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