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패스트 패션

2013.05.01 21:13 입력 2013.05.01 22:44 수정

10여년 전만 해도 서울 명동 상권의 ‘지존’은 구두 매장이었다. 금강제화·에스콰이아 등 메이저 제화업체들은 명동의 목 좋은 곳을 점령하다시피 하며 위세를 과시했다. 구두 상품권이 명절 선물의 대명사로 꼽히던 시절이다. 명동의 풍경은 2000년대 중반 이후 달라졌다. 2005년 일본 유니클로를 시작으로 자라, 망고, H&M 등 해외 SPA 브랜드 매장들이 줄줄이 상륙하면서다. 이제는 명동을 ‘SPA의 거리’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SPA란 전문점(Speciality retailer), 자사 상표(Private label), 의류(Apparel)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합성어다. 옷을 직접 기획해 직영매장에서 판매하는 시스템을 가리킨다. SPA 업체는 계절별로 신상품을 내놓는 일반 의류업체와 달리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신상품을 1~2주 단위로 출시한다. 다품종 소량생산과 빠른 회전율이 승부처다. ‘빠름’이 알파이자 오메가인 까닭에 이들이 내놓는 상품은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으로 불린다.

패스트 패션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유행을 앞서가되 값은 비교적 저렴하다. 부담없이 사서 입고 싫증나면 부담없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강점이 가격에 있다면, 약점도 가격에 있다. 일정한 수준의 질을 유지하면서 가격을 낮추는 일은 쉽지 않다. 생산에서 유통, 판매에 이르는 과정에서 누군가 희생해야만 시스템이 유지된다. 희생은 하청을 맡은 제3세계 노동자들의 몫이다. 저가의류 생산국가인 베트남과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의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고 있다. 패스트 패션 매출 가운데 이들에게 돌아가는 부분은 3%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지난달 24일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한 의류공장 붕괴 참사로 패스트 패션 생산기지의 참혹한 현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무너진 8층 건물 안에선 3100여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여성들이다. 참사 이후 저가의류 생산을 아웃소싱해 온 서구 의류업체들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일부 업체는 피해자들에게 보상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지만 대부분 업체는 나몰라라 하는 모양이다. 이들 업체만 나무랄 일도 아니다. 타인의 노동에 제값을 치르지 않고 무임승차해 온 소비자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