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극복·구조조정 지휘한 ‘지장’…강봉균 전 재경부 장관 별세

2017.02.01 20:47 입력 2017.02.01 20:52 수정

‘꾀주머니’ 경제전문가 평…2002년 재·보선서 당선 정계 입문

80년대 신군부 ‘차출’엔 버티기…노무현 후보 경제 공약 주도

1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빈소에서 조문객들이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연합뉴스

1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빈소에서 조문객들이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연합뉴스

김대중 정부 시절 경제사령탑을 맡아 외환위기 극복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지난달 31일 별세했다. 향년 74세.

강 전 장관은 췌장암으로 입원치료를 받아왔으며 최근 건강 상태가 급속히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공식 석상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해 11월30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펴낸 <코리안 미러클4 :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 발간 보고회였다. 당시 그는 “정치적 불확실성만 제거하면 (한국 경제의) 잠재력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선진적 기업지배구조 확립, 경영 투명성 확보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마련도 역설했다. 강 전 장관은 암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이 책의 편찬위원장을 맡았다.

1943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강 전 장관은 입지전적 인물로 통한다. 군산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로 3년 일했다. 가정 형편 때문에 교사로 일해 학비를 벌어 대학에 가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학입시에서 두 번이나 실패했다. 당시 인기가 높은 서울대 화공과와 기계과를 지원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서울대 상대에 늦깎이로 입학한 뒤 1968년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경제개발계획을 주도한 경제기획원에서 경제기획국장, 차관보를 지냈으며 김영삼 정부에서 노동부 차관과 경제기획원 차관, 정보통신부 장관 등을 거쳤다. DJ 정부에서는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요청을 받아 정책기획수석을 맡았고 3개월 후 경제수석으로 옮겼다. 외환위기 극복과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설득, 정치권의 압력을 차단해 장관들이 소신껏 일을 하도록 도왔다. 1999년 이규성 전 장관에 이어 DJ 정부 두 번째 재경부 장관에 올랐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등과 함께 재벌 개혁, 부실 기업과 금융기관 구조조정 등을 지휘했다.

2002년 8월8일 재·보선에서 고향인 군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그해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의 경제분야 공약을 주도했다. 17∼18대 국회의원으로 활약했으며 2012년 3월 민주통합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군산대 석좌교수, 건전재정포럼 대표를 맡으며 경제 원로로서 활동했다.

지난해 4·13 총선 당시에는 새누리당에 입당해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다. 기준금리를 내려도 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가 심각한 만큼 한국은행이 산업은행과 주택금융공사의 채권을 직접 사주는 형태로 돈을 풀자며 한국형 양적완화를 제안해 주목받았다.

행정부·입법부를 두루 거치며 40여년간 경제전문가로 활동한 그는 지장이란 평가를 받는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이자 아이디어가 많은 꾀주머니로 불렸다. 호불호가 분명한 성격이어서 1980년대 초 신군부가 경제기획원 고참 과장인 그를 차출하려 했으나 못 가겠다고 버틴 일화가 있다.

빈소가 차려진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는 1일 학계와 재계, 전·현직 관료, 정치권 인사, 시민들이 찾아 애도를 표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서혜원씨(71)와 아들 문선씨(43), 딸 보영씨(42)가 있다. 발인은 3일 오전 7시, 장지는 전북 군산 옥구읍 가족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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