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민 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
수익성만 따지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오지에도 우체국은 있는데
왜 유독 의료만 돈벌이 대상이 돼 공공병원의 적자를 문제 삼나
지난해 6월 초,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를 찾던 태백병원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7월부터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를 봤는데, 사정상 빨라도 9월 중순이 돼야 일을 시작할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면 서류를 제출할까 한다”는 내용이었다. “상부에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그다음 날엔 병원에서 전화를 했다. “서류 꼭 제출해주세요. 임용일자는 면접 이후에 결정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고도 태백병원에 지원서가 도착한 것은 ‘서류를 왜 안 내느냐’고 병원 측에서 독촉 전화를 한 이후였다. 지원서를 보낸 인물은 뜻밖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 수석기술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의료의 질과 성과 워킹파티’ 의장,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 이력이 화려했다. 몇번의 공고에도 아무도 지원을 안 해서 번번이 허탕치던 자리에 그의 ‘스펙’은 넘쳤다. 주인공은 의사 김선민이었다.
그는 9월18일부터 태백병원 직업환경의학과장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심평원 임기를 마친 후 진료 현장으로 다시 돌아온 그를 지난 26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고액 연봉을 내걸어도 지역에선 의사 구하기가 힘든 마당에 태백으로 향한 그의 행보가 궁금했다. ‘소아과 오픈런’ ‘빅5 병원 상경 치료’ ‘중증 의료 인력 부족·지역의료 공백’ ‘이로 인한 의대 정원 확대’ 등까지 물어불 사회 현안도 한둘이 아니었다.
지난해 3월 심평원에서 퇴임한 그는 “심평원 경력으로 로펌·제약회사 등 이해충돌 우려가 있는 곳은 일단 안 가기로 정했고, 이왕이면 현장에서 환자를 보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의료계의 산적한 문제들은 인구 절벽·지역 격차 등 여러 문제와 얽혀 있어 “의대 정원 확대만으로 안 된다”면서 “의사들이 필요한 곳에 가서 일하게 하는 정책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공공의료를 확충하지 않는 한 현 의료체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도 했다. 의료 취약지와 필수 의료영역을 지키는 병원이 있으려면 공공병원의 ‘착한 적자’를 보전해줄 정부의 의지와 실효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공공의료의 중요성을 절감했으면서도, ‘공공의료 강화’에 대한 얘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을 걱정했다. 국공립 어린이집·공립 학교는 있어야 한다면서 왜 유독 의료는 ‘돈벌이 대상’이 돼 공공병원의 적자를 문제 삼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수익성만 따지면 절대 있을 수 없는 곳에도 우체국은 있다. 소방서, 파출소도 마찬가지”라며 시민 건강권을 위해 공공병원을 확충·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 심평원장 임기를 마쳤는데 아쉬운 점이 있나요.
“국민에게 가장 와닿는 것이 병원 평가 정보일 텐데요. 의료는 대표적으로 시장 경제가 작동하지 않는 분야로, 의료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인해 어느 병원이 좋은지 나쁜지 환자들이 알 수가 없어요. 이 비대칭성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는 게 플레이어로서 심평원의 중요한 역할인데 어려워요. 예를 들어 심근경색증을 어느 병원에서 잘 치료하는지는 국민의 초유의 관심사인데, 그 평가를 관련 학회의 반대로 못한 지 한 10년 됐거든요. 심평원에 입법 권한이 없으니까 못하고 있다가 원장 임기 말쯤에 조금 풀었어요. 2022년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이 통과돼 심평원이 평가자료를 요청할 수 있다는 규정이 마련되긴 했는데, 끝까지 프로세스가 바뀌는 걸 못 보고 나왔어요. 환자가 하는 의료의 질 평가도 세계적인 트렌드인데 우리는 의료계 반발이 심하죠. 세계 3대 석학 중 하나인 마이클 포터는 비용을 많이 쏟아부어도 결국 환자에게 좋은 의료라야 한다고 주장하거든요. 세계적으로 환자들의 삶의 질에 무게를 두고, 환자의 관점에서 비용이 높아지는 게 타당한지에 대한 논의가 되고 있는데 아직 한국은 거기까지는 못 미치죠. 병원 평가도 사망률만 평가할 게 아니라 환자들이 퇴원 후 병원이 어땠는지 등 이런 것들을 보자고 하고 있는데 운만 떼놓고 시작도 못한 게 아쉬워요.”
- 현장으로 돌아오셨는데요.
“임기 끝나면 ‘뭘 할 거냐’고 많이들 물어봤어요. 하지 말아야 할 건 이미 정했어요. 심평원 경력으로 로펌·제약회사 등 이해충돌 우려가 있는 곳은 안 가겠다 정도였죠. 기왕이면 현장으로 가면 좋겠다 싶어서 가끔 의사 구인 사이트에 들어가 보곤 했는데 태백병원에서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를 구한다는 공고가 떴더라고요. 책을 쓸 생각이었던지라 일단은 접었죠. 몇주 있다가 다시 보니까 또 보이더라고요. ‘사람을 못 구했나 보네’ 한 번 알아보기라도 하자고 병원에 전화했어요. 지난해 6월 초쯤이었을 거예요. ‘당장 7월부터 일할 사람을 구하신다는데 사정상 9월이나 돼야 갈 수 있다’고 했어요. 병원에선 지원서 내고 합격하면 출근 시점은 조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그 전에 병원에 한 번 갔었어요. 생각보다 서울에서 멀지 않더라고요. ‘여기 괜찮겠다’ 하곤 있었는데, 병원에서 왜 지원서 안 내느냐고 독촉 전화가 오더라고요. 그래서 서류를 냈는데 지원자가 저밖에 없었다고 해요. 나중에 부원장님한테 들었는데 혹시나 ‘제가 안 온다고 할까 봐’ 걱정하셨대요.”
- 가보니 어떠신지요.
“아주 잘 온 것 같아요. 제 업무는 근골격계 질환으로 진단받으신 분들의 직업병 여부를 판정하기 위한 소견서를 쓰는 일이에요.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하고, 굉장히 힘든 일이죠. 그분들 만나 이야기 들으면 한 사람의 역사가 보여요. 병을 어떻게 앓아왔는지뿐만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지까지 알게 됩니다.”
- 직업병 환자들을 많이 보실 텐데요.
“산재요양급여 신청서에 기업주 의견을 쓰는 항목이 있어요. 산재가 인정되더라도 기업주는 불이익을 안 받아요. 그런데도 기업주가 쓴 의견을 보면 환자를 몰아붙이는 경우가 있어요. 반면 비슷한 업종인데도 ‘회사에서 무리한 일을 했다’고 잘 써주는 곳도 있어요. 어느 날 갑자기 훌륭한 기업주가 생길 수는 없고, 제도가 뒤따라야 해요. 이를 추동해내는 것은 국민의 인식이고요. 여기 와서 보니까 대부분 환자들이 60이 넘어서야 병원에 와요. ‘아프다’고 하면 일자리 잃을까 봐 참고 있다가 퇴직을 앞두고, 아니면 퇴직 후 산재 신청을 해요. 그런데 그때는 나이가 들어서 병이 난 건지 일 때문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요. 그러다보니 산재 인정을 받으려고 사투가 벌어집니다. 평소에 노동자들이 충분히 쉴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이런 갈등 비용도 줄일 수 있겠죠.”
- 태백병원은 어떤 곳인가요.
“산재전문 병원이지만 주민들도 오세요. 환자들은 검진 때가 의사를 만나는 유일한 기회인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태백은 의사의 개입이 많이 필요한 동네예요. 젊은 분이었는데 당뇨·혈압도 있고 몸무게도 안 좋았어요. 운동은 안 한다고 하고, 술도 많이 마시더라고요. 그런 분들 대부분 우울증인 경우가 많아요. 그 고리를 끊어줘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을 땐 무력감을 느껴요. 가령 살을 좀 빼는 것부터 시작하려고 해도 막상 운동을 도와줄 사람이 옆에 없어요. 지역에 의사만 없는 게 아니라, 안타까운 일입니다.”
- 공공병원 문제를 더 잘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공공의료 문제는 어느 정권의 책임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천박한 의료 문화의 결과인 것 같아요. 물론 역사적인 경로는 있어요. 건강보험제도를 빠르게 발전시켜 오면서 늘어난 의료 수요에 대처하려면 제일 필요한 게 병원을 짓는 거였어요. 그래서 민간 병원이 엄청나게 많아지게 된 거예요. 민간 병원만 성장하면서 공공병원인 지방의료원들은 비효율의 대명사가 돼 버렸죠. 진주의료원만 해도 강제로 문을 닫았잖아요. 공공병원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지는 다들 아실 거예요. 저소득층이 치료를 받으러 갈 곳이 없어져요.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최일선에서 대응했던 공공병원들은 지금 큰일이에요. 공공병원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전폭적 재정 지원이 있어야 하지만, 그에 대한 의지나 책임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요. 바람직한 방향은 지자체에서 공공병원을 짓는 건데, 적자가 나니까 안 하죠. 공공병원이 저소득층이나 꼭 필요한 진료에 쓰이기보다는 수익을 내길 원하니까요. 그러다보니 지역 의료 공백이 심각해지고 어려운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어요. 원론적으로 공공의료가 확충·강화된다면 어떨까요. 수익을 따지진 않겠죠. 쉽게 말하면 시골 우체국인데, 수익성만 따지면 절대 있을 수 없는 곳에도 우체국은 있잖아요. 소방서, 파출소도요. 근데 유독 의료는 돈을 따진단 말이에요. 인구 절벽 문제에서 가장 핵심이 의료인데요. 의료체계가 이렇게 위기라면 공공의료에 돈 써야 한다는 담론이 형성돼야 하는데, 아예 없어요. 국공립 어린이집, 공립 학교는 있어야 한다면서. 병원은 아닌가요?”
지역에 의사 부족하고 필수 의료 시스템 붕괴엔 여러 문제 얽혀
의사들이 필요한 곳에 가서 일하게 하는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 그사이 중증 의료 인력 부족과 지역 의료 공백이 시급한 사회 현안으로 대두했습니다. 의대 정원 증원에 ‘찬성이냐 반대냐’고 묻는다면요.
“분명한 건 의과대학 정원 확대만으로 안 된다는 것이에요. 지역에 의사들이 부족하고 필수의료 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에는 여러 문제가 얽혀 있는데요. 우선 공공병원이 많이 생겨야 하고요. 의사들이 필요한 곳에 가서 일하게 하는 정책들이 뒷받침되지 않고 의사 수만 늘린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고령화 사회에서 의사 수가 적은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다만 의사 수만 늘리는 것은 마치 사막에 물 붓는 것 같다는 말씀이에요. 따지고 보면 한국 의료 문제들은 인구 문제, 지역 격차하고 맞닿아 있거든요. 아무리 의사를 늘려도 태백엔 안 와요. 이건 또 다른 문제니까요. 왜 의사들은 연봉 4억∼5억원을 준다고 해도 지역에 안 갈까 하는데, 그 이면에는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들이 다 있다는 얘깁니다.”
- 의사들이 ‘돈 되는 과’에 몰리는 현상은 어떻게 보세요.
“소아과 오픈런만 해도, 비보험이 많아야 병원에 수익이 많아지는데 소아과는 비급여 나올 데가 별로 없거든요. 결국은 수가 문제와 관련 있고요. 애들 수도 줄었잖아요. 의사들한테 소아과를 오픈할 만한 동기 마련이 안 되니 안 하는 거죠. 의사들 입장에선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됐는데 국가가 의사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개인의 선택을 막을 순 없잖아요.”
- 공공의료를 확충하지 않는 한 현 의료체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보시나요.
“그나마 교통이 좋아져 지역에서도 수도권이나 인근 큰 도시 병원으로 가는 걸로 해결할 수 있으니 다행이죠. 태백에서도 원주 세브란스병원, 강릉 아산병원 이런 데로 가더라고요. 멀리 치료 받으러 다니려면 부담이 크죠. 결국 큰 도시에 자식이 살거나 경제적으로 버틸 만한 사람들만 가게 되겠죠.”
재정위기라고 의보료 올리고 급여 혜택 줄이면 몇년 뒤 부작용
보장성 강화와 재정 효율화는 서로 다른 축…건보 개혁 필요성
국민에 필요한 것은 병원 평가 정보일 텐데 시장경제 작동 안 돼
병원 평가도 사망률뿐만 아니라 환자들에 의료의 질 물어봐야
- 의료정책 전문가로서 건강보험 정책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다면요.
“제 책에 윤석열 정부에서 전 정부의 건강보험 강화 정책이 선심성 정책으로 치부되는 것 같아서 좀 안타깝다고 썼는데요. 보장성 강화와 재정의 효율적 사용은 양립할 수 없는 가치가 아니에요. 서로 다른 축이죠. 그간 보장성을 확대해 왔는데, 이를테면 안 들어간 것은 간병비 같은 건데요. 간병 행위는 의료 안에 들어 있지 않지만, 국민이 간병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으니 새로운 항목으로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죠. 넓은 의미로 보장성 강화의 한 축이죠. 효율적인 부분은 아주 다른 얘기예요. 지불제도를 바꾸고, 어떤 부분에 과잉 투입됐던 걸 줄여서 다른 부분에 넣는 문제예요. 의료 경제학에 나와요. 재정위기라고 의료보험료 올리고 급여 혜택을 줄이거나 하면, 몇년 지나 그 병 때문에 지불해야 할 비용이 더 커진다는 겁니다. 즉 전기료 많이 나온다고 에어컨을 끌 게 아니라 절전용 에어컨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예요. 그런 식의 건강보험 개혁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 책 말미에 박노해 시인의 ‘이제 길이 끝나면’이란 시를 인용했는데요. 길 끝에는 어떤 길이 있을까요.
“암 앓고 나서는 뒤는 생각 안 해요. 지금은 태백에서 일하는 것이 좋아요. 그저 태백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보듬을 수 있으면 해요. 여기 오고 나서 가장 먼저 보인 게 병원 200m 거리에 있는 가정폭력상담소였어요. 후원 회원으로 가입했는데요. 찾아보면 그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겠어요? 그런 면에서 의사는 참 좋은 직업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