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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 지위 변경, 기뻐만 할 일일까요

2021.07.09 06:00 입력 2021.07.09 06:01 수정

[한반도 줌인] “멀게만 느껴지는 외교 현장 이야기를 친절하고 깊이있게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지난 2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 한국의 지위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이 큰 화제를 불렀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6일 국무회의에서 “명실상부하게 선진국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의 ‘위상 강화’는 2019년 세계무역기구(WTO) 개도국 지위 포기 선언, 올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초청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1996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가입 당시 농업과 함께 정부가 ‘예외’로 둔 환경 분야에서도 사실상 선진국으로 간주된다. 다만 영화 <스파이더맨>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과연 한국은 지위 격상에 뒤따르는 유·무형의 비용을 치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을까.

■ 지위 변경은 ‘상징적’ 조치

제68차 유엔무역개발회의 무역개발이사회는 한국을 그룹 A(아시아·아프리카)에서 그룹 B(선진국)로 지위를 변경하는 안을 회원국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기구가 설립된 지 57년 동안 회원국 지위가 바뀐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한국의 사례가 전무후무하지만, 실제 무역 분야에서 미칠 파급은 거의 없다고 한다. 지위 변경에 따른 새로운 권리나 의무가 부여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미 공여국으로 기구의 주요 기능인 ‘개도국 기술지원’에 적극 기여해왔고, 협상그룹에서도 일본·미국·캐나다·호주 등이 속한 JUSCANNZ, 즉 유사입장국 그룹에 속해 있었다.

이번 지위 변경은 원조를 받기 위해 유엔무역개발회의의 문을 두드린 나라가 반세기만에 선진국으로 ‘공인’됐다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다만 선진국 그룹과 함께 일치된 행보를 보여야 하는 ‘무형’의 책임은 뒤따를 수 있다. 정부 소식통은 “주요 현안에서 그룹별로 목소리를 낼 때 선진국과 의견을 같이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정부 소식통도 “국제사회에서 누구와 어울리느냐, 어느 집단에 속해 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전했다.

2019년 10월24일 WTO 개도국지위 유지관철을 위한 농민공동행동 관계자 등이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정부의 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정책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2019년 10월24일 WTO 개도국지위 유지관철을 위한 농민공동행동 관계자 등이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정부의 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정책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기후변화 분야도 선진국 대열

사실 한국이 세계 경제 10위권에 진입하면서 통상 환경에서도 실질적인 변화가 시작된 지 오래다. 미국 등 주요국이 운용하는 ‘개도국 명단’에서도 한국을 속속 제외하는 추세다.

정부는 2019년 10월 WTO 내에서 더 이상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국내 농업산업 보호를 위해 WTO 출범 초기부터 유지해온 입장을 바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의 압박이 결정타였다. 개도국 지위를 계속 유지함으로써 얻는 실익이 거의 없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농업분야가 포함된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은 10여년 넘게 답보 상태였다. 기존에 타결된 협상에서 적용받는 개도국 우대(S&D)도 그대로 유지된다.

한국이 아직 개도국으로 분류되는 분야에서도 사실상 선진국 수준의 요구나 대우를 받고 있다. 세계지식재산기구(WIPO)에서 한국은 ‘아시아 그룹’ 소속이지만, 특허출원이 높은 선진 5개국 협의체인 IP5의 회원으로 탄탄한 입지를 자랑한다. ‘선진국 클럽’인 OECD에 가입하면서 한국이 개도국 지위를 요구했던 농업, 환경 분야에서도 변화가 뚜렷하다.

1992년 채택된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에 따르면 한국은 개도국에 속한다. 후발 산업국가들은 선진국과 달리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는 협약 정신에 따른 것이다. 이후 국제적 기후변화 대응 논의가 교토의정서(1997년), 파리협정(2015년)으로 진화하면서 한국도 개도국의 입장을 더는 고수하지 않는 상황이 됐다.

정부는 지난해 유엔에 2015년 이후 5년 만에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제출하면서, 처음으로 BAU(배출전망치)가 아닌 절대량(536백만t)을 기준으로 택했다. 파리협정은 선진국들이 감축목표를 절대량에 연동해 제시할 것을 의무화했다. 기후 협상에 정통한 정부 당국자는 “한국은 NDC 포뮬러(산정 방식)를 BAU에서 절대량으로 바꾼 유일한 나라”라며 “기후변화 대응에서 선진국에 준하는 의무를 지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12월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파리 기후협정 채택을 축하하고 있다. 유엔 홈페이지

2015년 12월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파리 기후협정 채택을 축하하고 있다. 유엔 홈페이지

■선진국 ‘청구서’ 대비하고 있나

이제 한국이 원하든, 원치 않든 선진국 대접을 받고 있는 상황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문제는 선진국 ‘비용’이다. 20년 이상 근무한 간부급 외교 관료들이 일련의 흐름에 ‘격세지감’을 토로하면서도 “남들이 추켜세울 때는 다 이유가 있다. 국제사회의 요구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탄소중립 2050’ 선언을 포함해 기후변화 선도국을 자처한 한국은 당장 ‘기후재원 기여’라는 과제를 맞닥뜨리게 됐다.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들은 2020년까지 개도국의 기후 대응 지원을 위해 연간 1000억달러 규모의 기후재원을 조성하기로 합의했는데, 한국에 더 많은 기여를 요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후 대응 논의에 정통한 외교소식통은 “기후재원에 대한 선진국들의 기여 문제는 올해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의 최대 쟁점”이라며 “(한국의 기여를) 더 큰 폭으로 확대해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재정 부담 증가보다 더욱 시급한 과제는 외교전략의 정비다. 한국이 참석한 G7 정상회의 공동성명에서 보듯 ‘선진국’들은 코로나19 대응, 개도국 지원, 미·중 간 민감한 현안까지 거침없는 입장을 표명한다. 정부 당국자는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대신 치러야 할 비용도 커진다”며 “전략적 접근과 철학에 입각해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영국 콘월에서 지난 6월12일 열린 G7 정상회의 참가국 정상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사이에 서 있는 이 사진을 홍보하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맨 왼쪽)을 잘라내 논란이 됐다. 청와대 제공

영국 콘월에서 지난 6월12일 열린 G7 정상회의 참가국 정상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사이에 서 있는 이 사진을 홍보하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맨 왼쪽)을 잘라내 논란이 됐다.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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