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정보산업성’을 신설한 까닭?

2022.02.06 08:19 입력 2022.02.06 08:55 수정

체신성·전자공업성·국가정보화국 합친 ICT 총괄 공룡 부처

북한 평양시 평천구역의 미래과학자거리에 레지던스 은하 타워, 김책공업종합대학 교육자 아파트를 비롯한 고층 아파트들이 서 있다.  김책공업종합대학 홈페이지

북한 평양시 평천구역의 미래과학자거리에 레지던스 은하 타워, 김책공업종합대학 교육자 아파트를 비롯한 고층 아파트들이 서 있다. 김책공업종합대학 홈페이지

지난 1월 25일 ‘문재인 정부의 1호 간첩 사건’의 대북사업가 김호씨가 1심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받았다. 김씨는 중국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북한 인공지능 개발자를 고용해 만든 안면인식 기술로 도어락을 개발한 인물이다. 개발자가 북한인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제품을 국내에 팔았다가 재판에 넘겨졌다. 북한에 개발비 명목으로 수억원을 건넨 혐의와 군사상 기밀을 누설한 혐의도 받고 있다. 법적 문제는 따져봐야겠지만 남북이 과학기술을 활용해 교류하는 일이 외줄타기처럼 위태로울 수 있다는 점과 북한이 인공지능 분야에서 상당한 인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관심을 받고 있다.

최근 10년 사이 북한은 정보산업 분야를 적극 육성하고 있다. 정보화로 경제 전반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목적이다. 중공업과 달리 에너지 소비가 상대적으로 덜한 정보산업이 더 유망하다고 판단한 이유도 있다. 비교적 소수의 전문인력과 일부 하드웨어만 있으면 급진적 개혁 없이 추진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5월 등장한 정보산업성이다.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2021~2025)의 첫해 목표 달성을 독려하는 선전화. 조선중앙통신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2021~2025)의 첫해 목표 달성을 독려하는 선전화. 조선중앙통신

■과학기술 분야 연구자 3배 확대

정보산업성은 북한의 정보통신 분야 주요 기관인 체신성(통신 업무)과 전자공업성(IT 하드웨어 담당), 국가정보화국(정보화 사업 총괄)을 합친 부처다. 최현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책임연구원은 “지난해 북한 ICT 분야의 가장 큰 변화라면 정보산업성의 출범을 들 수 있다”면서 “지난해 연말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8기 제4차 전원회의에서 처음 정보산업을 언급했는데 정보산업성 출범과 함께 이 분야를 집중 육성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고 평가했다. 변학문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은 “정보화가 국가 핵심 목표의 하나가 됐는데 이를 총괄하라고 만든 부처인 국가정보화국의 힘이 약했다”며 “북한도 공무원 조직 간 칸막이가 심해 말을 안 듣는 편인데 이를 억누르고 조절하기 위해 힘센 조직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최대 규모의 IT 전시회는 옛 국가정보화국이 2016년부터 개최하는 ‘전국정보화성과전람회’이다. 2019년에는 디지털경제의 북한식 용어인 ‘수자경제’가 등장하는데 당시 대회의 주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정한 ‘수자경제와 정보화 열풍’이었다. 지난해 2년 만에 열린 전국정보화성과전람회의 주최기관은 정보산업성이었다. ‘자력갱생과 정보화 열풍’을 주제로 약 한달간 화상으로 열렸다. 북한도 코로나19 이후 온라인 회의나 행사가 각종 대면 행사를 대체하고 있다. 북한 화상회의 시스템으로는 김일성대가 만든 ‘락원’과 삼지연정보센터가 개발한 내각 화상회의 시스템 등이 있다. 국제회의에 참석할 때는 ‘줌’과 중국에서 만든 ‘부브미팅’ 등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인공지능 기술 개발 기업인 ‘압록강기술개발회사’의 홍보 사진. 조선화보사 발행 <조선>

북한의 인공지능 기술 개발 기업인 ‘압록강기술개발회사’의 홍보 사진. 조선화보사 발행 <조선>

정보산업 육성은 2011년 집권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일관되게 추진해온 과학기술 중시 정책의 일환이다. 노동력이 부족하고, 국제 제재로 고립이 심화된 북한에서 믿을 건 과학기술밖에 없다는 생각이 더 강해지는 추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집권 후 ‘지식경제시대’로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제시했다. 2016년 조선노동당 제7차대회 중앙위원회 사업총화 보고서를 보면 “전민의 과학기술 인재화는 가까운 시일 내에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자를 3배 이상 확대하며, 이를 위해서 전민이 대학 졸업 수준의 혁신역량 보유를 목표로 함”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수학·과학 과목 교육 시수 크게 늘려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위해 평성(평양에서 북서쪽으로 30㎞ 떨어진 위성도시)의 과학기술전당을 중심으로 과학기술보급망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의무교육 기간을 2017년부터 11년에서 12년으로 전면 확대했다. 수학·과학 과목의 교육 시수는 개편 전 38%에서 45%로 늘었다. 지역 간 교육 격차 해소 방안으로 김일성대 등 주요 대학이 만든 교재와 강의 방법을 지방에 전파하는 ‘학술일원화 사업’도 시행한다. 이공계 분야 주요 3대학인 김일성대·김책공대·리과대학을 강의중심 대학에서 ‘연구형 대학’으로 바꾸고 부설 연구소를 여럿 세워 생산현장에서 제기된 연구 과제를 맡겼다. 과학기술 인재 우대에도 적극적이다. 과학기술자의 사기 진작을 위해 평성에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조성해 입주시켰다. 과학자 휴양소와 전용상점인 ‘미래상점’을 설립해 싼 가격에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공계 인력 확보를 위한 원격 교육도 강조한다. 2010년부터 김책공대에서 시작해 김일성대 등 주요 대학에 우리의 사이버대학과 같은 ‘원격학부’를 만들었다. 이곳을 나오면 동일한 학사 학위를 인정한다. 원격학부에는 제대군인을 비롯해 농장과 기업의 노동자들이 주로 참여하는데 약 10만명 정도 등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변 소장은 “최근 ICT 분야에 종사하는 젊은 탈북자분을 만났더니 영상 강의 하나를 내려받는 데 요즘 북한에서도 1~2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면서 “그분이 지역의 중심도시에서 왔다는 걸 감안해야 하지만 사각지대를 계속 개선해가고 있는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2019년 열린 전국정보화성과전람회 행사장의 모습.  조선중앙통신

2019년 열린 전국정보화성과전람회 행사장의 모습. 조선중앙통신

김정은 집권 후 두드러진 과학육성 정책의 성과로 해외 발표 논문의 증가를 들 수 있다. 북한과학기술네트워크(NK테크)에 따르면, 북한 연구기관이 과학기술인용색인(SCI)과 스코푸스(SCOPUS) 등재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의 수는 2011년 39편에서 2020년 251편으로 6.4배 증가했다. 북한 내부 연구 역량의 향상도 엿보인다. 2010년대 초만 해도 발표 논문 중 대다수가 국제공동연구 결과물이었다. 2019년 이후엔 국제공동연구보다 북한 단독 논문의 수가 더 많아졌다. 북한 과학자를 주저자로 등재한 논문의 수는 2011년 26편에서 2020년 197편으로 7.6배 늘었다. 최현규 연구원은 “연간 200건 정도면 국내 단과대학 수준도 안 되지만 증가율만 보면 10년 사이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면서 “과거 북한 과학자들은 논문 쓰는 법도 잘 몰라 인용을 거의 하지 않고 완전히 창작하듯이 만들었는데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해외 나간 과학자, 1순위 작업은 ‘자료 구입’

북한은 명문대인 김책공대 안에 수재반을 따로 운영할 정도로 수재 교육에 집중한다. 특기생처럼 육성한 IT인재들은 국제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2020년에는 인도 민간기업이 주최하는 국제 코딩대회 ‘코드쉐프’에서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 학생들이 거의 돌아가면서 우승했다. 미국 컴퓨터협회가 운영하는 세계 최대 대학생 프로그래밍 경시대회인 ‘ACM-ICPC’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2019년 열린 대회에서 7위를 차지한 서울대에 이어 북한 김책공대 학생들이 8위를 기록했다. 다음 대회인 2021년 대회에서도 김책공대와 리과대학이 결승참가권을 얻었지만 코로나19 상황에 출전을 포기했다고 한다. 최현규 연구원은 “하드웨어나 네트워크는 장비 싸움이지만 소프트웨어는 머리 좋은 애들을 붙여 개발하면 되기 때문에 북한이 역점을 두고 있는 분야”라면서 “기술 유입이 힘든 북한에서 이 정도 대회의 결승전에 나갈 인력들이 있다는 건 굉장히 놀라운 사실”이라고 말했다.

2021년 8월 대면과 화상으로 동시에 진행된 온실남새부문 과학기술토론회.  조선중앙통신

2021년 8월 대면과 화상으로 동시에 진행된 온실남새부문 과학기술토론회. 조선중앙통신

북한은 고립된 사회다. 반강제로 자력갱생을 해야 하는 상황은 과거 사용하던 ‘주체과학’이라는 용어에서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북한 과학자들이 해외 기술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최현규 연구원은 “해외에 나간 북한 과학자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책자를 구입하고, 인터넷에서 데이터를 다운받아 가져오는 것”이라면서 “최근에는 주체과학이라는 말도 잘 안 쓰고, 해외 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들자는 말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북한은 상대적으로 첨단기술보다 현장기술을 중시한다. 최 연구원은 “첨단과학기술에서 북한이 경제력 있는 나라를 뛰어넘기는 어렵다”며 “예산이 부족한 상황에서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공장과 농장 등 생산 현장에서의 기술을 중시한다”고 말했다. 부품과 자재 수급이 원활하지 않다 보니 최근 2~3년 사이엔 자원 재활용 기술도 크게 주목받고 있다. 우리가 타이어의 내구성을 높이는 방법을 연구한다면, 북한은 기존 타이어를 재생해 사용하는 기술에 관심을 갖는 식이다. 버려진 세탁기와 냉장고의 부품 하나 기판 하나까지 다 재활용한다. 최 연구원은 “북한은 소위 저에너지 생산 시스템을 고민하는 중”이라면서 “나중에 교류가 활발해지면 북한의 기술을 탄소제로 경영에 활용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듯 닮은 북한의 과학기술 용어

분단 이후 70년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남북 간의 언어생활에서 차이가 커졌다. 일례로 ‘일없다’는 말을 우린 쌀쌀하고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만, 북에선 ‘괜찮다’는 뜻으로 쓴다. 우리의 오징어를 북한은 낙지라고 부른다. 북한의 오징어는 우리의 갑오징어를 일컫는다. 북한에서는 새끼 문어를 낙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한은 두음법칙(일부 소리가 단어의 첫머리에 발음되는 것을 꺼려 다른 소리로 발음되는 현상)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ㅣ, ㅑ, ㅕ, ㅛ, ㅠ’ 앞에서도 ‘ㄹ’이나 ‘ㄴ’이 ‘ㅇ’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류산’(유산), ‘란소’(난소), ‘류황’(유황), ‘림업’(임업)이라고 말한다. 외래어를 우리 말로 표기할 때도 차이가 있다. 과학용어는 상당부분 외래어인데 남한이 영어를 기본으로 한다면 북한은 러시아어를 기본으로 한다. 독일어와 일본어 용어도 자주 쓴다. 그래서 북에선 칼로리를 ‘카로리’, 코사인을 ‘코시누스’, 에너지를 ‘에네르기’, 뉴런을 ‘노이론’이라고 부른다. 외래어를 조선어로 바꾸면서 낯설어진 부분도 눈에 띈다. 다이오드를 ‘이극소자’로, 드라이아이스를 ‘고체탄산’으로, 임피던스를 ‘완전저항’이라고 쓴다. 뜻이 같은데 우리와 다른 한자를 쓰거나, 한자를 우리 말로 바꿀 때 차이를 보이는 예도 있다. 돌연변이를 ‘갑작변이’로, 광전류를 ‘빛전류’라고 쓰는 식이다.

김정은이 ‘정보산업성’을 신설한 까닭?


북한보다 우리의 언어가 더 다양하게 변한 측면도 있다. 최현규 연구원은 “북한은 언어도 사회 유지의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용어 관리를 잘한다”면서 “우린 전문용어는 특히 제대로 관리를 안 해 자기 마음대로 쓰는 일도 많다”고 말했다.

물리 분야에서 남북 간의 용어 차이는 20~30% 정도로 추정한다. 대부분의 말은 알아들을 수 있지만 핵심적인 단어를 모르면 서로 오해할 수 있다. 현장에서 남북 과학교류에 앞서 용어부터 통일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변학문 소장은 “용어의 75%가 같으니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문용어의 25%가 다르면 외계어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전문용어에 대비되는 남쪽의 전문용어가 통일돼 있지 않다는 점까지 고려해야 한다”며 “무리한 통일 작업을 벌이기보다 동의어 사전처럼 정리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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