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이트’는 등잔 밑에 있었다

2015.05.15 21:52 입력 2015.05.15 21:58 수정

역대 정권 뒤흔든 권력형 비리

▲ 정권마다 시작만 창대한 ‘부패 척결’
박정희, 정경유착·금권정치 본격화
전두환, 형·동생·처남 구속
노태우, 소환조사 받은 첫 대통령

▲ 김영삼, 한보 특혜·김현철 게이트
사상 첫 현직 대통령 아들 구속
김대중, ‘리스트’만 30가지 넘어
‘홍삼 트리오’ 사건 세 아들 유죄 확정

▲ 노무현, 최측근 비리로 탄핵소추
이명박, 형·친구·사돈·사촌처형 연루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정국을 뒤덮고 있다. 홍준표 경남지사에 이어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검찰에 소환되는 등 살아 있는 현재 권력 8명이 리스트에 올랐다. 역대 대통령들은 취임과 함께 비리 추방을 약속했지만 용두사미로 끝났다. 권력형 비리는 제도화, 구조화, 은폐와 조작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어서 매번 ‘몸통과 깃털’ 논쟁이 벌어졌다.

역대 정권의 권력형 비리는 권력무상을 불렀다. 어느 정권이든 비리와 부정부패 척결 의지는 용두사미였다. 첫 정치자금 비리로 기록된 이승만 정권의 ‘대선 중석불 사건’을 시작으로 직전 이명박 정권의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아랫줄 가운데)과 천신일 세모그룹 전 회장(최 전 위원장 오른쪽)까지 권력의 등잔 밑은 늘 어두웠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역대 정권의 권력형 비리는 권력무상을 불렀다. 어느 정권이든 비리와 부정부패 척결 의지는 용두사미였다. 첫 정치자금 비리로 기록된 이승만 정권의 ‘대선 중석불 사건’을 시작으로 직전 이명박 정권의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아랫줄 가운데)과 천신일 세모그룹 전 회장(최 전 위원장 오른쪽)까지 권력의 등잔 밑은 늘 어두웠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이승만·박정희 정권… 부패의 서막, 정경유착

이승만 정권의 권력형 비리는 권력 실세들이 미국의 원조물자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터져나왔다. 1952년 발생한 중석불(重石弗, 텅스텐을 수출해서 번 외화) 불하 사건은 한국 최초의 정치자금 사건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자유당은 무기제조용 중석을 헐값에 불하해 일부 업자들에게 폭리를 주는 대신 막대한 정치자금을 거둬들였다. 그해 8월 대선을 앞두고 벌어졌다.

박정희 정권 18년은 정경유착과 금권정치를 본격화한 시기였다. ‘4대 의혹 사건’(1963년)이 신호탄이다. 민정 이양에 필요한 정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는 주가조작으로 부당이익을 챙겼다. 중정은 워커힐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정부 지원으로 조달한 뒤 횡령했다. 새나라자동차 면세 도입 건은 중정이 일본제 승용차를 불법 반입한 뒤 시가의 두 배 이상으로 판매, 폭리를 취한 사건이다. 빠찡꼬 100대를 재일교포 재산인 것처럼 속여 수입을 허용하기도 했다. 이듬해엔 제일제당, 대한제분, 대한양회 등 19개 기업들이 가격조작과 세금포탈로 약 50억원의 부당이득을 얻은 ‘3분 폭리 사건’(1964년)이 터졌다. 정부가 뒷돈(약 3800만달러)을 받고 이를 묵인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 전두환·노태우 정권… 부패로 얼룩진 ‘정의사회’와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

전두환 전 대통령은 ‘통치자금’ 명목으로 재벌 돈 약 1조원을 거둬들였다. 전 전 대통령의 인척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사건(1982년)은 ‘건국 후 최대 금융사기 사건’으로 불렸다. 어음사기 규모는 7000억원이 넘었다.

각종 재단도 의혹투성이였다. 일해재단 설립 때 50대 재벌이 약 600억원의 기금을 냈지만 일부 기부금 행방이 밝혀지지 않았다. 부인 이순자씨의 새세대심장재단(299억원)은 심장병 수술 지원에 70억원 정도만 쓴 것으로 드러나 나머지 사용처에 의문이 일었다.

하이라이트는 평화의 댐 건설 모금이다. 국민성금(661억원) 사용 내역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동생 경환씨(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는 본부 기금 횡령과 탈세 혐의로, 형 기환씨는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 사건으로 구속됐다. 처남 이창석씨는 탈세와 횡령 혐의로 철창 신세를 졌다.

노태우 정권에서도 수서비리(1990년), 율곡비리(1993년), 슬롯머신 비리(1993년) 등 권력형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95년 11월 비자금 문제로 검찰 소환조사를 받은 첫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카지노 대부 정덕진씨가 비자금으로 관련법 개정 로비를 벌인 슬롯머신 비리 사건으로 박철언 의원과 이건개 대전고검장, 엄삼탁 병무청장 등 10여명이 구속됐다.

모든 ‘게이트’는 등잔 밑에 있었다

■ 김영삼 정권… 실패로 마감한 ‘신한국 창조’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밀실 정치자금 척결’을 선언하며 취임했다. 그러나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 아들이 구속된 ‘김현철 게이트’까지 휘몰아쳤다. 김 전 대통령은 1992년 대선 때 남은 자금을 안기부 계좌에 예치한 뒤 1996년 15대 총선 자금으로 사용했다. 비자금 규모만 1157억원인 ‘안풍 사건’이다.

1997년엔 단군 이래 최대의 부도 사태라는 한보 특혜대출 비리 사건이 터졌다. 5조원 규모였다. 당시 자산순위 30대 그룹에 불과했던 한보그룹은 김영삼 정권에서 단숨에 14위로 수직 상승했다. 수서 사건으로 물러났던 정태수 회장은 재기 과정에서 여야에 조직적인 로비를 벌였고 부도난 유원건설을 단돈 1원에 넘겨받았다.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8명에 대한 소환조사까지 이어졌다. 신한국당 최형우, 김덕룡 의원과 국민회의 김상현 의원, 자민련 김용환 의원 등 정치권 거물급 의원들이 포함됐다.

1997년에는 소통령 현철씨가 비자금(120억원) 관리, 각종 이권 개입, 뇌물수수에 연루된 ‘김현철 게이트’가 발생했다. 현철씨가 한보 특혜융자의 배후인물이며, 국정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김 전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아들과의 절연을 선언해야 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세풍’이 강타했다.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 등이 세제 혜택을 미끼로 23개 대기업에서 약 166억원을 대선자금으로 불법 모금했다. 세풍 3인방인 이 전 차장과 서상목 전 의원,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동생 회성씨가 연루됐다.

■ 김대중 정권·노무현 정권… 국민 없는 ‘국민의 정부’, 상식과 원칙을 되돌린 ‘참여정부’

김대중 정권에서는 ‘○○○ 리스트’라는 이름이 붙은 권력형 비리 사건이 30가지가 넘었다. 1999년 외화 밀반출 혐의를 받던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부인 이형자씨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연정희씨(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 등 고위층에 고급 옷 로비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후 특별검사제가 도입됐다.

김대중 정권 말기 정현준, 진승현, 이용호, 윤태식 이른바 4대 게이트가 이어졌다. 4대 게이트는 벤처 열풍을 이용해 투자자들의 돈을 끌어모았고, 이 과정에서 정·관계 로비를 벌였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김 전 대통령은 2001년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대국민사과를 했다. 2003년 현대의 대북사업 등을 지원하는 대가로 비자금 200억원을 받은 혐의로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이 구속 수감됐다. 돈 문제로 구속된 것만 세 번째였다. 권 전 고문은 스스로를 ‘정치자금의 정거장’이라고 했다.

장남 홍일씨는 나라종금 인사 청탁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차남 홍업씨는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으로 근무하며 각종 이권 청탁을 받고 대가를 받는 등 알선수재와 변호사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삼남 홍걸씨 역시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로비(일명 최규선 게이트)와 공사수주 로비 대가 등으로 약 37억원을 받은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세상은 ‘홍삼 트리오’ 사건이라 칭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 직후인 2002년 12월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연수회에서 “지금부터는 누구든지 이권이나 인사 청탁을 하다가 걸리면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실은 대통령의 의지와 엇박자를 냈다.

구속 1호는 노 전 대통령 최측근인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었다. 최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 당선 직후인 2002년 12월 말 SK그룹 손길승 회장으로부터 축하금 명목으로 양도성 예금증서(CD) 등 약 22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사건으로 2004년 3월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했다.

‘386 측근’들도 걸려들었다. 안희정 전 민주당 최고위원과 이광재 전 의원은 기업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것이 드러나 징역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민정수석실에 특별감찰반을 두고 사돈과 종친회까지 포함된 900명에 이르는 친·인척들을 대상으로 상시 관리 시스템을 운영했다. 하지만 형 건평씨는 차명 주식투자, 고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 유임 청탁 로비 의혹, 농협의 세종증권 매입에 개입한 혐의로 구설에 올랐다.

2009년 6월12일 검찰은 대통령 후원자인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발표했다. 노 전 대통령도 재임 중 박 전 회장으로부터 600만달러를 받았다는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검찰의 신병 처리 여부 결정을 앞둔 2009년 5월23일 노 전 대통령은 경남 김해 봉하마을 자택 뒷산 언덕에서 투신, 서거했다.

■ 이명박 정권… 거꾸로 간 ‘친서민’ ‘공정사회’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9년 4·19혁명 제49주년 기념식에서 “선진화는 절대로 부정부패와 함께 갈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은 집권 내내 미래의 걸림돌과 결별하지 못했다.

새 정권 출범 6개월도 되지 않아 이 전 대통령의 사촌처형 김옥희씨의 30억원 수수 사건이 터졌다. 대통령의 40년지기 친구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이 세무조사 무마 청탁 대가로 박연차 전 회장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고, 이 전 대통령 사돈인 효성그룹과 관련된 의혹이 불거졌다. 형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은 비리 백화점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정권 실세들의 무덤이 된 SLS 사건, 씨엔케이 주가조작 의혹,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저축은행 비리와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 등이 비리 릴레이처럼 전개됐다. 임기를 1년여 남겨둔 시점에 비리에 연루됐거나 의혹을 받은 측근이 18명이나 됐다. 이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를 대비한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을 둘러싼 의혹으로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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