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칠 때 떠나라지만… 한국 프로야구 베테랑의 운명

2012.04.01 22:29

이종범은 지난달 25일 잠실 두산 시범경기를 앞두고 머리를 짧게 깎았다. 이종범은 “그냥 깎았다”고 했지만 지난해 가을 이종범의 머리는 파마를 한 기다란 곱슬머리였다. 지난해부터 이종범은 타격 자세를 바꿨다. 자신의 나이를 인정했고, 그만큼 느려진 스피드를 인정했다. 스트라이드 폭을 줄이고, 스윙의 각을 좁혔다. 이종범의 상징과도 같았던, 장갑을 끼지 않은 채 맨손으로 쥐던 오른손에 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악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종범은 그렇게 자신의 20번째 시즌을 애써가며 준비하고 있었다. 시범경기 타율은 3할3푼3리(12타수 4안타)로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소용없게 됐다. KIA 선동열 감독은 삼성 시절인 2010년 양준혁을 은퇴시켰다. 자신의 은퇴 경험에 따라 “박수칠 때 떠나는 게 좋다”는 게 이유였다. 선 감독은 1일 “삼성이 강해진 이유도 베테랑들이 떠났고 젊은 선수들이 기회를 얻어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종범의 갑작스러운 은퇴 결정에 대해 한 야구 관계자는 “한국야구가 베테랑을 대하는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장면”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감독으로서는 이종범을 대수비, 대주자로 쓰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다. 어린 선수들을 기용하는 게 편하다. 하지만 그런 부담감 때문에 경험 많은 베테랑을 버리는 것은 잘못됐다”고 말했다. 그는 “시범경기, 시즌 초반도 마찬가지다. 고참들에게 먼저 기회를 주고 자연스럽게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방식으로 가는 게 순리다. 젊은 선수들에게 먼저 기회를 주고 베테랑들을 백업으로 쓰는 것은 둘 모두에게 상처를 준다”며 “그러나 그게 지금 한국 야구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베테랑들은 큰 경기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김인식 감독은 지난 1995년 두산 감독으로 취임한 뒤 직전 시즌 ‘항명’ 파동을 겪었던 ‘베테랑’들을 버리지 않았다. 박철순은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결정적인 순간 호투를 펼치며 자신의 마지막 시즌을 우승과 함께했다. 2007년 SK 감독으로 취임한 김성근 감독도 시즌 초반 김재현을 중용하지 않았지만 이를 통해 분발을 이끌어냈다. 김재현은 2007시즌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다. 메이저리그 탬파베이가 만년 꼴찌 시절을 딛고 2008시즌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한 데는 베테랑 마무리 트로이 퍼시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퍼시벌은 시즌 중 두 차례나 부상자 명단에 올랐고 결국 포스트시즌에 뛰지 못했지만 시즌 중 팀 불펜 투수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종범은 “지난 시즌 끝난 뒤 바로 (기용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면 좀 더 준비할 시간이 있었겠지만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점은 아쉽다”고 말했다. 주니치 시절 함께 뛰었던 삼성 오치아이 투수코치는 트위터를 통해 “이런 식으로 그만두는 경우가 있다니…”라며 “적어도 이번 한 해는 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와 싸우고 싶었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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