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그 노래가 있었네](1)나훈아‘사랑은 눈물의 씨앗’

2001.10.14 16:50

-‘꺾고넘는’창법따라 70년대 세월 한녹듯-

1966년 데뷔앨범 ‘천리길’. 이 노래는 한동안 큰 인기를 누렸지만 배호의 노래 ‘황금의 눈’을 표절했다 하여 문제가 됐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은 같은 앨범에 수록됐던 곡으로 표절시비 이후 새로운 홍보곡으로 내세운 노래였다. 지금은 남국인 작사·김영광 작곡으로 돼있지만 발표당시는 손석 작사·작곡이었다. 당시 지구레코드 전속 작곡가였던 김영광씨가 뒷거래로 오아시스레코드 소속의 신인 나훈아에게 준 곡이었다. 이 때문에 오아시스 사장이었던 손진석씨의 예명을 쓴 셈이다.

나훈아의 창법은 미성과 가성의 선배가수 남인수와 이난영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뒤집고 꺾는 맛이 일품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국악공연을 보러다녔고, 외할머니가 애지중지하던 축음기를 통해 민요를 자주 들어온 나훈아였다. 궁상각치우의 리듬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터였다.

‘후라이보이’ 곽규석씨가 사회를 봤던 동아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첫무대. 짙은 눈썹과 미끈한 체격, 마치 산적같은 사내에게 여성팬들은 열광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은 당대의 연애정서를 반영한다. 남자에게 버림받고 울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던 시절. 사랑에 상처받고 음독자살을 택한 여성의 기사가 신문 사회면 가십거리에 오르내리던 시절이었다. 음반판매가 불투명했던 그 시절 전축이 있던 집에는 어김없이 나훈아의 음반 한장이 있었다.

당시 국회 본회의에서도 그의 노래가 등장한다. 70년 그 유명한 ‘정인숙 사건’때였다. 세간에는 의문의 살인사건의 배후에 최고권력자가 연계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나를 죽이지 않았다면/영원히 우리만 알았을 걸/죽고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당시 신민당 조윤형 의원은 의사당에서 이 노래를 개사한 노래가 대학가에 유행한다면서 당사자들이 진실을 밝히라고 따졌다. 소위 ‘노가바’가 그 당시에도 유행했던 셈이다.

당시 그와 쌍벽을 이루던 가수가 ‘님과 함께’의 남진. 마치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케 했던 곱상한 청년가수 남진은 화려한 무대매너와 특유의 눈웃음으로 뭇여성들을 사로잡았다. 나훈아가 정통 트로트 가수였다면, 남진은 변형 트로트 가수였다.

두 사람은 70년대 벽두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면서 최대 라이벌로 부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당대 박정희 정권과 대항하던 두 야당지도자와 자주 비견됐다. 경상도가 고향인 나훈아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전라도가 고향인 남진은 김대중 대통령과 각각 동류항이었다. 나훈아는 “내가 한번 전국 리사이틀을 돌고 오면 남진이 나섰다”면서 “이번 리사이틀에서는 유리창이 몇 장 깨졌는지가 인기를 가늠하는 척도였다”고 말한다. 이들의 숙적관계는 73년 9월 서울시민회관 공연때 군특수부대 출신의 ㄱ씨가 ‘남진의 사주를 받았다’면서 깨진 맥주병으로 나훈아의 얼굴에 자상을 입히며 첨예화됐다. 조사결과 ‘일을 저지른 뒤 남진에게 대가를 요구하려 했다’는 정신이상자의 범행으로 밝혀졌지만 팬들이 극단적으로 나뉘어 감정싸움을 하는 계기가 됐다. 가수데뷔 36년째. 그동안 발표한 곡만도 2,500여곡.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청년이다. 또 당대 최정상의 트로트 가수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갈무리’ ‘무시로’ ‘울긴 왜울어’ ‘고향역’ ‘영영’.

그의 노래에서 느껴지는 구수한 시골된장찌개 맛은 고집스럽게 전통을 지켜온 자존심의 산물이다. 그래서 아직도 사람들은 그를 ‘대한민국 노래꾼 나훈아’라고 부른다.

▲정인숙사건이란

1970년 3월 자신의 코로나승용차를 타고 가던 여대생 정인숙이 강변도로에서 권총으로 살해된 채 피살체로 발견됐다. 수사과정에서 장안 최고요정의 스타였던 정양의 비밀수첩에서 수많은 정재계 거물급 인사들의 명단이 발견됐다. 그러나 ‘권력기관이 개입된 살인’이라는 의혹만 남긴 채 함께 차를 몰고가던 그의 오빠 종욱씨가 살해범으로 지목되어 구속되면서 사건이 마무리됐다.

그러나 여대생의 신분으로 장안 최고의 요정을 전전하면서 권력자와 재력가의 노리개가 됐던 그의 살해사건으로 권력자들의 문란한 사생활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그는 이미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는 아들 성일군을 두고 있었다. 성일군의 아버지가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설도 있었고, 국무총리 정일권씨라는 설도 나돌았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아들 성일씨는 친자확인소송을 위해 91년 귀국했다. 정일권씨가 성일씨의 친부로 지목됐으나 성일씨가 돌연 소송을 취하하여 끝내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 정일권씨도 이 문제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은 채 94년 작고했다.

그러나 ‘정인숙 사건’은 이후 조국 근대화를 이뤄냈던 제3공화국을 파탄의 길로 이끌고 가는 기폭제가 됐다.

/오광수기자 ok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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