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 교양과 감수성의 원천
어린 시절 부모님은 맞벌이하시느라 우리 삼형제를 집에 놓아두고 아침 일찍 일을 나가셨다. 처음에는 시집 안 간 이모가 집안일을 했고, 그 뒤에는 식모 누나가 들어와서 집안일을 맡았지만, 엄마의 빈자리를 메울 수는 없었다.
그 대신 부모님은 우리 삼형제가 읽을 만한 책들을 많이 사주셨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100권짜리 <딱따구리 그레이트 북스>이다. 천연색 표지에 꽤 멋진 삽화가 곁들여진 이 전집은 다양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고, 번역이나 해설도 상당히 훌륭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순신, 간디, 파스퇴르, 아문센, 에디슨 같은 위인전과 더불어 명작 동화들, 그리고 어린아이용으로 각색한 <삼국유사> <삼국사기> <로마제국흥망기> <흰 고래 모비딕> 같은 책들로 구성됐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가장 탐독했던 책들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100권짜리 전집 가운데 유독 즐겨 읽던 책들이 있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로마제국흥망기> 같은 역사책과 <대도둑 호첸플로츠> <날으는 교실> <에밀과 소년탐정들> 같은 동화다. 표지가 떨어져 나가고 책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희한하게 다 읽은 책인데도, 읽을 때마다 재미가 있었다. 아니, 특히 재미있는 부분을 다시 경험하기 위해 그 책들을 읽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어린 시절 쌓은 교양과 감수성의 절반 이상은 아마도 이 책을 통해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지금도 대도둑 호첸플로츠가 먹던 감자 요리와 소시지가 어떤 맛일지, 그의 커피 기계에서는 어떤 노래가 흘러나왔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