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주 교수 “땅속에 묻힌 한국전쟁 진실 캐는 일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 쓰겠나”

2020.06.13 06:00

1기 진실화해위원회 유해발굴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장인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운데)가 지난 5일 충북 청주시 남일면 고은리에 있는 유해 매장 추정지에서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청주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장인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운데)가 지난 5일 충북 청주시 남일면 고은리에 있는 유해 매장 추정지에서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청주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지난 5일 충북 청주시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해발굴 현장에서 만난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고고미술사학과)는 진행 중인 발굴 작업과 관련한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박 교수는 1960년대부터 고고학과 인류학을 연구하며 유골을 발굴·분석해온 이 분야의 권위자다.

그는 1999년 무렵 한국전쟁 50주년을 기념해 6·25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이 진행되면서 가슴 아픈 현대사와 마주하게 됐다. 군에서 박 교수에게 자문을 요청했고, 유해발굴팀을 꾸리는 일에 참여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 당시에는 유해발굴단장으로 활약했다. 한국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군인과 민간인의 유해발굴작업 모두에 초기부터 참여한 셈이다. 박 교수는 “뼈는 말을 한다”고 했다. 뼈를 통해 한 사람의 직업과 습관은 물론 당대의 사회경제적 환경도 추측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군인과 민간인의 유해를 발굴해 제대로 모시는 일은 경중을 따질 것 없이 모두 중요하다”고 했다.

박 교수와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민간인 학살 희생자, 집단으로 발견”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사업
1년에 예산 10억이면 충분
일각서 정치적 문제로 접근
과거사법에 포함 안 돼 아쉬워

-6·25 전사자 유해와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해는 어떤 차이점이 있나.

“군인 유해는 한 명 한 명 따로 떨어져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참호나 이동 중 총이나 포탄에 많아 숨지기 때문에 사망 당시의 자세나 위치도 각각 다르다. 많아야 2~3명이 한 지점에서 발견된다. 전쟁 중 시신이 제대로 수습되지 않아 낙엽이 두껍게 덮인 채 발견되거나 참호 안에 그대로 누워있다가 자연적으로 흙이 쌓이는 식이다.

반면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은 집단으로 발견된다. 한 지역에서 수백명의 유해가 나온다. 죽임당한 뒤 인공적으로 판 구덩이나 광산, 자연동굴 등에 버려진 것이다. 공주시 상왕동에서는 4개 구덩이에서 총 400여명의 유해가 나왔다. 구덩이 안에 뒤엉켜 있거나, 능선을 따라 일렬로 발견되기도 한다. 땅을 파놓고 난사하거나 정연하게 줄을 세워두고 총을 쏜 것이다. 손이 뒤로 묶인 채 무릎 꿇린 모습으로 발견된 경우도 있다. 국군 전사자 대부분은 20대 전후의 남성인데, 민간인 희생자 중에는 남성이 많지만 여성과 어린아이도 적지 않다.”

-국군 유해발굴이 법으로 규정되기 전과 후는 어떤 차이가 있었나.

“군대는 위계질서 속에서 지휘 계통이 분명하기 때문에 인력 동원이나 내부적 반발 등의 문제는 많지 않았다. 다만 지방자치단체나 다른 정부 기관의 협조를 구해야 할 때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런 부분은 관련 법이 만들어지고 나서 사라졌다. 군 내부에서도 변화가 많았다. 1년 예산이 90억원까지 책정된 적도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돈으로 전사자 유가족들의 ‘유전자은행’을 만들고 유해의 유전자를 모두 검사해 유족을 찾는 작업을 했다. 전사자 유해발굴이 법으로 규정되면서 군대 내에 유해발굴을 전담하는 기구가 만들어졌다. 법이 만들어진다는 건 결국 예산이 생기고 인력이 생기고 일이 굴러간다는 것이다.”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은
침해당한 국민의 인권 앞에서
반성하고 재발 막겠다는 다짐

-전사자와 민간인 희생자의 유해발굴은 의미가 다를 것 같다.

“국군 유해발굴은 국가를 위한 헌신적인 죽음을 기억한다는 의미가 있다. 민족사적인 가치를 더하고 국가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인데, 소속원들에게 사회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키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장엄한 의식을 치르는 것도 이런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서다. 생명을 다해 군에 헌신한 만큼 전사자의 유해는 반드시 찾아 가족에게 돌려주겠다는 계약 같은 것이다.

민간인 희생자의 유해발굴은 인류의 보편적인 인권 가치로 바라봐야 한다. 국가가 제대로 경영됐다면 민간인들이 ‘빨갱이’ 소리를 듣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시대적 상황이 있었지만, 국가가 국민을 지키지 못하고 참혹한 일을 자행했다는 것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하늘로부터 받은 권리인 삶과 생명을 누려야 한다. 유해발굴은 자국민의 인권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일을 반성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의 의미를 담을 수 있다. 선진국으로 나아가려면 국가정체성과 인권이 두 개의 수레바퀴가 돼 잘 돌아가야 한다. 유해발굴이 그 상징적인 모습이 될 것이다.”

아파트·농장 등 어디서든 발견
도로 공사 도중 나오는 경우엔
공사 늦어질라 버렸단 소문도
훼손 방지 등 현장 협조 어려워
법적 근거가 필요한 까닭

-유해발굴 현장이 훼손되는 경우가 많은가.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작업 당시에 매장 추정지였던 뤼순감옥 뒤편에 아파트가 들어선 걸 본 기억이 난다.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훼손된 곳이 분명히 많을 것이다. 아직 찾지 못한 국군 전사자 유해가 14만구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어디에 있을까. 예전에는 도로 공사를 하다 유해가 나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공사가 늦어질 수도 있어서 몰래 내다 버렸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렸다. 그동안 훼손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매장지를 감안하면 희생자의 3분의 1만 찾아 모셔도 적지 않은 수치일 것이다. 민간인 학살 피해자는 최소 30만에서 최대 100만명이라고 한다. 일부 훼손됐을 수 있지만 여전히 땅속에서 발굴되지 않은 유해가 많이 남아있다고 본다.

제대로 조사하고 여러 기관의 협조를 구하는 일이 유해발굴에서 중요하다. 법적 근거가 필요한 것도 그래서다. 1기 진화위에서 조사가 안 됐던 지역에서 유해가 나온 적도 많았다. 민간인들이 자연굴에서 처형돼 매장됐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 보니 농장 주인이 이미 땅을 메워버린 곳도 있었다. 주인에게 협조를 구해 발굴한 결과 20~30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주인이 협조에 응하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사유지에서 발굴이 진행되는 경우도 많다. 작업 종료를 채근하는 소유자들을 위한 대책 등 체계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유해발굴은 현세와 연결된 문제”

-민간인 희생자의 유해발굴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땅속에 있던 진실을 바깥으로 꺼내는 일이다. 희생자들을 이젠 편안히 보내준다는 의미도 있다. 과거에는 희생자 유족들이 사회적으로 수많은 불이익을 받았다. 유해를 발굴해 그 한을 풀어주는 것은 그들을 정상적인 사회로 돌아오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선 사후 매장을 할 때 봉긋한 봉분으로 산소를 만든다. 이는 전생과 현세가 연결된 것을 상징한다. 죽은 자와 남은 가족들의 삶이 연결된다고 보는 것이다. 조상의 유해를 제대로 모시지 않아 안식할 수 없으면 후손들이 편히 못 산다는 게 한국인들의 정서에 깔려있다. 전통적인 사고로 볼 수도 있지만, 유해를 발굴해 모시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도 연결된 일이라는 의미다.”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에 무엇이 절실한가.

“유해발굴 작업 시 통상 한 달에 1억원가량이 필요하다고 본다. 1년에 5차례 발굴을 하면 이런저런 비용을 다 더해도 10억원이 넘지 않는다.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사업을 하는데, 1년에 10억원이면 많지 않은 예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유해발굴을 정치적 문제로 해석하고 늦추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일제강점기 때 강제 징용돼 일본 홋카이도에서 사망한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할 때도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이 있는 것 같았다. 이번 과거사법에도 유해발굴에 대한 조항을 추가했으면 좋았을 텐데 결국 하지 못했다. 유해발굴에는 여야가 없다. 희생된 분들에 대한 예의인 것이다.”

■진실화해위, 활동 끝나면 발굴·연구 등 올스톱…‘과거사 3법’ 마련해야

한국전쟁 당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유해발굴과 배·보상 등 과거 청산을 요구하며 수년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과거사법 통과를 요구해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전쟁 당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유해발굴과 배·보상 등 과거 청산을 요구하며 수년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과거사법 통과를 요구해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9년 상·하반기에 나눠 발간된 진실화해위원회의 제7·8차 보고서는 3가지 정책 건의를 남겼다.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과 안장에 대한 필요성과 함께, 과거사연구재단 설립과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대한 배·보상 특별법 제정에 대한 내용이었다.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극적인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선 유해발굴뿐만 아니라 앞선 작업을 연구·계승하고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배·보상을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과거사 기본법 개정안의 입법 활동을 벌였던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과 과거사재단 설립 및 배·보상에 관한 법률 제정의 필요성을 살펴봤다.

과거사재단 설립은 이미 법적 근거가 존재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 기본법) 제40조는 “정부는 위령 사업 및 사료관 운영·관리 등을 수행할 과거사연구재단을 설립하기 위하여 자금을 출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과거사재단 설립을 의무화한 건 아니지만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는 대목이다.

과거사재단은 진화위 활동 종료 후 과거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활동을 이어가고, 피해자 치료나 학술 연구, 국가기관의 권고 사항 이행 등을 확인하며 협조 업무 등을 담당하는 기관을 가리킨다. 과거사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조사 기구인 진화위가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웠던 역할을 주로 맡는다. 5·18기념재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주4·3평화재단 등이 비슷한 유형의 모델이다.

이런 재단이 필요한 이유는 1기 진화위 활동 중단 이후의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국가 단위의 유해발굴 사업은 즉시 멈췄고, 피해자 지원, 과거사 연구 등도 모두 중단됐다. 어렵게 모은 과거사 사건의 조사 자료 등은 국가기록원에 보관 중이다. 진화위가 재가동될 예정이지만 이는 한시적인 기구다. 미리 과거사재단의 설립을 준비해야 같은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

배·보상 문제는 방대한 피해 규모에 따라 천문학적인 국가 예산이 투입돼야 한다는 이유로 입법 과정에서 금기시돼 왔다. 실제로 지난 5월 과거사 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되기 전 ‘피해자 및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한 배상 등 방안을 강구’한다는 조항이 야당인 미래통합당의 문제제기로 빠졌다. 통과된 과거사 기본법에 유해발굴과 마찬가지로 배·보상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지 않은 이유다.

정확한 피해규모가 파악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필요 예산을 쉽게 규정할 수 없다. 하지만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들에 대한 배·보상은 현재도 각 법원 단위에서 개별적인 민사소송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문제는 민간인 학살 유형은 대부분 비슷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2009년 2월10일 선고가 이뤄진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 유족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은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지만, 다음날인 2월11일 같은 법원의 다른 재판부에서 이뤄진 ‘문경·석달 양민 학살 사건’은 원고인 유족들의 청구권 시효가 소멸됐다는 이유 등으로 기각됐다.

같은 비극을 겪은 유족임에도 개별 소송 과정에서 배·보상을 받게 된 이들과 그러지 못한 이들로 나눠질 가능성이 크다. ‘민주화운동보상법’과 같은 특별법을 두고 국무총리실 등에 심의위원회를 둬 일괄적으로 배·보상을 진행하는 것이 소모적인 법률 비용을 줄이고 국가가 책임도 질 수 있는 방편이다.

‘과거사 3법’이라고 불릴 만한 유해발굴, 과거사재단 설립, 배·보상에 관한 특별법은 각각 또는 서로 혼합하여 법적 근거를 반드시 만들어야 운용이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경호 사무국장은 “1기 진화위의 활동이 중단되면서 과거사 사건의 조사나 연구,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등에 대해 국가가 책임 있게 나서지 않아왔다”며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돼 2기 진화위 활동 재개를 앞둔 지금 미리 그 이후를 준비해야 중단 없는 과거 청산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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