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장마, 지방에서

2020.08.17 03:00 입력 2020.08.17 03:01 수정

지난 보름 동안 인터넷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가장 자주 보였던 문장은 ‘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위기입니다’였다. 흥미로웠던 것은 주위의 평범한 사람들도 기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국이 ‘기후악당’이라는 비판을 들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동안 우리 국민 다수는 여기에 둔감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단언컨대 그것은 ‘서울’에 비가 왔기 때문이다.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정부가 발표한 ‘그린뉴딜’에 ‘그린’도 없고 ‘뉴딜’도 없다는 전문가들의 비판도 있었지만 시민들의 공명은 적었다. 제대로 된 그린뉴딜이라면, 우선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먼저 설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전력발전체계와 운송수단, 산업에너지 자원을 재설계해야 맞다. 그러나 우리의 그린뉴딜에는 그린을 새로운 일자리와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계획만 무성하다.

제대로 된 그린뉴딜이라면, 탄소절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가 감내해야 할 삶의 근본적 변화를 위해 사회 각 부문의 당사자들, 사실상 모든 국민이 지켜야 할 새로운 사회협약이 필요하다. 그런 협약이야말로 뉴딜이지만, 우리의 그린뉴딜은 그저 정부의 재정투입 계획이나 기업지원 사업에 가깝다. 비판적 성찰을 찾아볼 수 없는 억지로 떠밀린 그린뉴딜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기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단언컨대 ‘서울’에 비가 왔기 때문이다.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는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비가 특정 지역에만 내리지 않고 서울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한편으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7월 하순에 남부지방에 엄청난 비가 오기 시작했을 때, 장마는 아직 먼 남녘의 일이었다. 뉴스는 매일매일의 정치 가십으로 한가로웠고 SNS는 여름휴가 이야기로 들 떠 있었다. 남쪽에서 사람이 죽고 농경지가 침수되었지만, 별일 아니었다. 어떤 기시감이 들었다. 뉴욕에서 몇 명이 죽은 것은 큰일이지만, 아프리카나 중동, 남미에서 수백 명이 죽은 사건은 뉴스가 되지 않는다.

8월이 되자 중부지방에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남한강과 북한강의 지류에 비가 오자 댐들이 방류를 시작했고, 한강의 수위가 높아졌다. 둔치와 잠수교는 물론이고 올림픽대로까지 일부 잠겼다. 방송사들은 상시 뉴스특보 체제로 전환했다. 강남역 하수도가 역류하여 지하철에서 내린 사람들의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홍수’였다.

남부지방에만 비가 오고 있을 때, 기상청은 변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수도권에 비가 오자 이것은 논란이 되었다. ‘비가 온다고 했는데 안 왔다’는 비난도 일었다. 기상캐스터들은 ‘국지성 호우라서 서울에는 비가 적게 왔지만, 인근 지역인 파주, 가평 등에는 많은 비가 내렸다’는 설명을 반복했다. 비가 행정구역을 알 리 없지만, 모든 것의 기준이 서울인 만큼 비도 서울에 와줘야 했다. 비도 말을 들어야 한다. 향후 기상청 예보 시스템의 관심이 어디에 집중될지도 분명하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비가 온다. 박 사장(이선균)의 가족이 고대하던 캠핑을 못 가게 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기택(송강호)의 반지하가 물에 잠긴 것은 종종 있는 그럴만한 일이다. 캠핑을 망친 아쉬움을 채끝등심이 들어간 짜파구리로 달래는 것은 뇌리에 선명하게 남지만, 기택의 가족들이 변기가 역류하는 집에서 무엇을 들고나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세상은 지하에 관심이 없다.

한국에서 이제 영호남 지역감정은 허깨비다. 대한민국은 수도권과 지방이라는 2개의 나라, 2개의 국민들로 나뉜 지 오래다. 돈과 인재, 기술과 기업이 서울로만 모이면서 수도권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지방은 서울을 위해 봉사한다. 지방의 모든 발전계획은 늘 특성화에 초점이 있다. 서울이 그것을 요구한다. 자족적인 지방은 포기된 지 오래다. ‘왜 지방이 모든 걸 다 하려고 합니까. 잘하는 걸 하세요.’ 서울에 사는 관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한때 국민 개개인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에 봉사했듯이, 이제 지방은 서울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 톱니바퀴처럼 움직여야 한다.

장마가 끝난 남부지방은 지난주부터 폭염이 시작되었다. 경로당을 무더위 쉼터로 운영 개시한 시점에 광복절 태극기 집회가 열렸다. 지방에서도 수백 명씩 참여했다. 서울에서 코로나19 n차 감염 경고가 있었던 날이다. 폭염에 무더위 쉼터를 다시 닫는 일은 저소득 독거노인들에게 치명적이다. 제 발등 제가 찍은 걸 어떡하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참석한 사람들만 위험해진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일은 아직 지방의 일이기에 뉴스에는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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