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는 정치를 보여달라

초등학교 시절 엄마 손을 잡고 금 모으기 운동을 하러 주택은행에 갔던 기억이 또렷하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신 금 모으기 운동으로 화제였고, 나는 국가를 위해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 같은 뿌듯함이 있었다. 그러나 IMF를 극복하기 위해 통과된 정리해고법과 비정규직 활성화와 같은 일들은 국난 극복을 위해 금 모으던 많은 시민들을 배신했다. IMF는 끝났으나 사라진 일자리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박진웅 편의점 및 IT 노동자

박진웅 편의점 및 IT 노동자

공익근무를 하면서 나는 금 모으기 운동의 패물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군인은 군인대로, 공익은 공익대로 사회에서 편리하게 쓰였다. 값싸고 젊은 인력들은 제대로 된 대우도 없이 사회에서 기피하는 일들을 도맡아 하고는 했다. 현역 군인들은 재해만 일어나면 수시로 동원되는 자원이었으며, 공익들은 현역 근무에 부적합한 신체적·정신적 조건을 가졌음에도 정신병원, 하수처리장, 지하철, 구급대, 복지원, 지자체, 학교 등에서 부족한 일손을 채웠다. 의무라는 이름으로 공짜나 다름없이 2년여를 희생하는 일이 당연했다.

편의점 일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담배와 주류를 판매하기 때문에 미성년자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다. 미성년자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담배나 주류를 사기 위해 시도한다. 신분증을 위조하는 등의 방법에 자칫 속으면 영업정지나 벌금을 감당해야 한다. 게다가 담배 매출 9할은 세금으로 떼어 가면서 담배 매출이 많다는 이유로 소상공인 지원을 못 받는 것은 덤이다. 환경보호를 위한다며 비닐봉지에 환경부담금 20원을 안 받으면 과태료를 무는 것도 소매상 책임이다. 세금도, 정책도 나라에서 매기고 시행하지만 욕먹어가며 책임지는 일은 개인의 몫이다.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정부는 내가 겪어온 모습 그대로였다. 의료진들이 과로로 무너진다. 소상공인들이 버티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다. 경영난에 회사들이 문을 닫는다. 은행 대출조차 막힌 사람들은 점점 빈곤해진다. 이 비극이 전염병 때문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정부는 그저 입에 발린 칭찬과 영웅시하는 말 몇 마디로 희생을 포장한다. 언론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영웅이라 외치는 모습은 마치 데자뷔 같았다.

대한민국은 일상적으로 사람을 제값으로 대하지 않는다. 정권과 상관없이 늘 그렇다. 필요할 때 편리하게 써먹는 공무원과 군인, 의료진들은 물론이거니와 방역을 위해 협조를 구한다며 강제로 영업을 제한하는 일을 고작 말 몇 마디로 해결하려 한다.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이들에게 적절한 보상과 대우는 없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참전용사들이 고통받는 역사 속에서도 정치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종종 케네디의 연설을 인용하며 “국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줄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십시오”라고 말한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몇 번이고 국가를 위해 의무를 다하고 희생을 감수한다. 억울하고 힘들어도 사회와 공동체를 위한다는 마음가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웅시된 채로 희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아직 그런 마음이 남아 있을까? 의료진 지원이 필요하다는 말에 힘내라는 응원을 하고, 죽겠다는 호소에 좀 더 참아달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정부에? 말뿐인 정치 앞에서 시민은 언제까지 일방적으로 국가와 정치를 믿어야만 하는가.

케네디는 연설에서 인류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 역사적 짐을 지고 싸우는 일에 동참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희생하고 노력하는 시민들이 정부에도 응당한 희생을 요구하길 원했다. 즉, 시민의 희생에 보답하고 책임지는 정치야말로 그가 남긴 진정한 메시지였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정치적 부담이 두려워 책임을 외면하는 정부에 묻고 싶다. 과연 우리의 정치는 견디며 싸우는 이들을 마주하고 답할 수 있는지, 응당한 책임을 원하는 시민의 요구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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