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은 혁명가의 아내

2017.07.17 11:13 입력 2017.07.17 22:11 수정
김영문 | 인문학자·번역가

혁명가의 가족은 각종 핍박과 압제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특히 혁명가의 아내는 혁명가보다 더 심한 고통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다. 혁명가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가열찬 투쟁에 헌신하며 광범위한 명성과 정치적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혁명가의 아내는 혁명가의 뒤에서 온갖 궂은일을 처리하며 심신의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시각각]홀로 남은 혁명가의 아내

지난 13일 세상을 떠난 중국의 인권운동가 류샤오보는 1982년 아내 류샤와 처음 만나 시 모임을 통해 사랑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류샤오보는 반체제 인권운동가가 아닌 평범한 대학원생이었다. 류샤는 시와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였다. 두 사람은 함께 시를 짓고 문학과 인생을 토론하며 호감을 키워갔다.

두 사람의 사랑은 6·4 톈안먼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러시아의 데카브리스트와 그의 아내들처럼 삶과 생명을 모두 건 비장한 운명으로 전환한다. 6·4운동은 중국 당국의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렸고 류샤오보는 1989년 6월6일 체포돼 1991년 1월까지 감옥살이를 한다. 류샤는 고난을 자처한 류샤오보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보내며 투쟁을 지지한다.

류샤오보가 다시 1995년 5월에서 1996년 1월까지, 그리고 1996년 10월에서 1999년 10월까지 체포 구금되어 노동교화형에 처해졌을 때도 류샤는 남편의 옥바라지에 헌신하며 사랑과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류샤의 부모도 딸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류샤의 부친은 부부장급(차관급) 고위 관료였고, 모친은 중화민국 시기 현장(縣長)을 지낸 국민당 간부의 딸로 알려져 있다. 보도에 의하면 류샤의 부모는 어릴 때부터 딸의 결정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개방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딸이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반국가사범을 남편으로 선택했는데도, 흔들림 없이 그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했다.

1996년 류샤오보와 류샤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장은 류샤오보가 수감 생활을 하던 감옥이었다. 당시 류샤가 면회를 갈 때마다 중국 당국은 두 사람이 정식 부부가 아니기에 만남을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류샤는 단호하게 “그럼 내가 바로 그 국가의 적에게 시집가겠다”고 선언했다. “우리의 신방은 한 칸의 죄수실/ 우리의 포옹과 키스엔/ 감시 경찰의 눈빛이 끼어들고/ 우리의 사랑은 숨을 데도 없었다”(류샤오보, ‘다시 한번 신부가 되어 주오-나의 신부에게’). 사랑이란 얼마나 위대한가. 부부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철옹성을 허물고자 치열한 투쟁을 계속해왔다. 두 사람은 무릎 꿇지 않았다.

류샤오보는 6·4 피의 참극 위에 세워진 중국의 고도 경제성장은 “부패한 자본주의/ 죽음에 직면한 공산주의/ 몰락한 봉건주의”(‘나는 나의 영혼을 방탕하게 하리라-6·4 7주년 추모제’)일 뿐이라고 했다. 그의 투쟁이 참으로 지난한 여정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범같고 사자같던 류샤오보도 오랜 기간 자신을 옥죄어온 심신의 스트레스를 끝내 이기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류샤도 장기 가택연금 속에서 불면의 고통에 시달린다고 한다.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의 밤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행복한 잠을 선사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이데올로기가 있을까.

류샤오보의 명복을 빌고 류샤의 건강을 기원한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