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구세주’ 자처하지만…벌써 ‘백신 볼모’ 우려

2021.03.01 21:25 입력 2021.03.01 22:10 수정

본격화되는 ‘백신외교전’

‘백신 구세주’ 자처하지만…벌써 ‘백신 볼모’ 우려

중국 ‘일대일로’ 수단 삼자
인도, 주변국 원조 경쟁 가세
러시아는 중남미 계약 체결

국익 도움 될 국가 선별 공급
“거절 힘든 요구받을 것” 지적
미국서도 적극 대응 목소리

코로나19 백신을 선점한 나라들이 백신을 외교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부자 나라들이 백신을 독점하다시피 하자 백신을 구하기 힘든 개발도상국과 빈국에 백신을 공급하며 ‘소프트파워’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 인도와 이스라엘까지 백신외교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백신을 가진 나라들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 나라를 선별해 백신을 공급하는 ‘체리피킹’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중국과 러시아는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마스크와 의료장비 지원에 이어 이제는 백신을 외교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선진국에 밀려 백신을 구하지 못하는 나라들에 백신을 제공하며 외교적 영향력을 키우려는 전략이다. 일례로 유럽연합(EU) 비회원국인 세르비아가 EU 평균보다 높은 백신 접종률을 기록한 것은 중국과 러시아 양쪽에서 백신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EU 회원국 헝가리도 지난달 24일(현지시간)부터 중국 시노팜, 러시아 스푸트니크V 백신을 수입해 접종을 하고 있다.

중남미 지역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미국에서 백신을 공급받지 못하자 대륙 너머 나라들과 백신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러시아로부터 백신 740만회분을 받기로 한 계약 체결을 위해 멕시코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직접 통화했다. 싱크탱크 러시아유럽아시아문제연구소(CREAS) 테리사 팰런 소장은 “야당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의 실형 선고로 EU,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러시아가 백신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백신을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과 해상 실크로드)의 핵심 전략으로 삼았다. 판매는 물론 무상으로 제공하며 ‘백신 원조’까지 하고 있다. 아프리카연합(AU) 53개국에 대한 원조 계획을 밝혔고, 이집트에도 30만회분을 기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중남미에선 우루과이, 브라질, 칠레, 멕시코 등이 중국산 백신을 사들이고 있다.

옌중 황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중국 정부의 백신 외교 목표는 광범위하다”면서 “코로나19 조기 확산을 은폐했다는 주장에 대응하는 것부터 영토 분쟁 문제로 동맹국들이 필요할 때도 백신 원조를 활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도는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기 위해 백신외교에 뛰어들었다. 인도에는 세계 최대 백신 제조사 ‘세럼 인스티튜트(SII)’가 있다. 매일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수백만회분을 만든다. 이미 네팔, 방글라데시 등 이웃나라들에 650만회분을 기부했다. 인도는 중국산 백신 효과에 대한 ‘검증된 자료’가 없다는 점을 내세워 자국산 백신을 홍보한다.

중국, 인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미얀마에서 기싸움의 사례가 확인된다. 중국이 백신 30만회분 공급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인도가 발빠르게 백신 170만회분을 먼저 미얀마로 보낸 것이다. 인도양의 섬나라 세이셸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다. 중국이 시노팜 백신 5만회분을 기부하자 인도도 바로 백신을 기부했다. “중국의 인도양 진출을 막으려는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코로나19 백신 접종률 1위인 이스라엘은 남는 백신을 체코,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에 공급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인정받기 위해 각국 대사관을 이곳으로 유치하려 노력 중인데, 이들 나라는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겼거나 이전을 검토 중인 나라들이다.

백신외교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아가테 데마리스 국장은 “러시아와 중국 등 백신외교를 펼치는 나라들은 자신들을 ‘구세주’로 표현하지만, 결국 백신이 지렛대가 돼 백신을 받은 나라들은 거절하기 힘든 요구를 받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내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백신외교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주도하는 국제 백신 공동 구매 및 배분 프로젝트인 코백스(COVAX)를 통해 더 많은 백신이 공급되도록 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28일 ‘백신외교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설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정복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 같은 독재국가 라이벌들에 ‘소프트파워’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국이 공평한 세계 백신 배포의 선두에 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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