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1년

전쟁 길어질수록 반전 목소리 약해지는 러시아…“적응, 체념, 두려움, 좌절”

2023.02.28 06:00 입력 2023.02.28 06:21 수정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년이 지났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러시아에서는 지난해 침공 직후와 부분 동원령 선포 직후를 제외하고는 큰 규모의 반전 시위가 없었다. 그마저도 2010년대 러시아에서 전개됐던 반푸틴 시위와 비교하면 산발적이고 강도도 약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전쟁 초기 서방은 경제 제재가 길어지면 전쟁과 푸틴 정권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반감이 끓어오를 것으로 전망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 그와 같은 신호는 감지되지 않고 있다. 러시아인들의 속마음은 어떤 것일까.

경향신문은 우크라이나 전쟁 1년을 맞아 러시아의 대표적 인권단체인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의 드미트리 마카로프 공동의장(40)과 러시아 독립언론 메디아조나 기자 알렉산더 보로디킨(34)을 지난 13일 각기 줌과 이메일을 통해 인터뷰했다.

1976년 설립된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은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인권단체이지만 지난 1월25일 법원에 의해 해산 명령이 내려진 상태다. 메디아조나는 푸틴 정권을 비판해 온 러시아 여성 펑크록 그룹 푸시 라이엇 멤버들이 2014년 설립한 독립언론으로, 러시아 정부에 의해 지난해 3월6일 폐쇄 명령이 내려졌다.

두 사람은 앞으로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러시아 시민들은 정치적 무관심과 정부의 탄압, 길어지는 전쟁에 대한 체념 등이 뒤섞여 거리에 나서기보다는 각자 살길을 찾기 위해 현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드미트리 마카로프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 공동의장. 드미트리 마카로프 제공

드미트리 마카로프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 공동의장. 드미트리 마카로프 제공

- 지난 1월25일 모스크바 법원이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 해산 결정을 내렸다.

마카로프 = 법원은 우리 단체의 명칭이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이고 모스크바에 등록한 단체임에도 모스크바를 벗어나 러시아 전역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해산 결정을 내렸다. 상소할 계획이고, 위법하다는 결정이 나올 것으로 믿는다. 우리는 과거 소련 시절부터 활동해왔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새삼스럽지 않다.”

알렉산더 보로디킨 메디아조나 기자. 알렉산더 보로디킨 제공

알렉산더 보로디킨 메디아조나 기자. 알렉산더 보로디킨 제공

- 메디아조나를 비롯해 푸틴 정권에 비판적인 러시아 독립언론들이 잇따라 폐쇄됐다. 취재는 어떻게 하고 있나?

보로디킨 = 전쟁 이후 러시아에서 취재하는 건 너무 위험해졌다. 러시아 가정이나 장례식, 집회 현장 등을 취재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미 러시아 독립언론들은 푸틴 정권의 언론 탄압을 피해 라트비아, 조지아, 리투아니아,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로 근거지를 옮긴 상태다.

마카로프 = 언론 자유를 옥죄는 법안의 숫자를 헤아리는 걸 어느 순간부터 포기했다. 이젠 자기가 하는 말을 스스로 검열해야 하는 상황이다. 다만 가상사설망(VPN)으로 우회 접속하면 러시아 내에서도 독립 매체의 기사를 볼 수 있다. 문제는 그 정보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다. 대부분은 정보가 있어도 그것을 정치적 행동으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 전쟁 1년이 다가오는데 푸틴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에 어떤 변화가 있나.

보로디킨 = 몇 문장으로 답하기 힘든 문제다. 전시의 러시아에서 여론조사를 제대로 할 방법이 있느냐는 사회학자들의 논쟁거리이기도 하다. 군에 대해 잘못 말했다가는 ‘가짜뉴스’ 유포로 처벌받는 상황이라 정직하게 말할 수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지지’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크렘린은 ‘특별군사작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해 긴박한 분위기를 가려버렸다. 일반인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만든 것이다. 절대다수는 단지 “순응하는” 지지자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들이 전쟁 문제는 그냥 정부에 맡겨둔다는 뜻이다. 개인의 원자화, 정치적 무관심, 정부의 탄압, 전반적인 체념 등이 뒤섞여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다.

-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시위가 약한 이유는?

마카로프 = 대규모 시위는 아니더라도 반대 목소리는 꾸준히 있었으나 최근에는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사람들은 전쟁이 길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현 상황에 적응하는 편을 선택했다. 거리에서 저항하는 대신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대다수 러시아인이 전쟁을 지지한다는 뜻은 아니다. 러시아인들은 수천 년 동안 국가의 탄압을 받아왔지만 늘 자유를 원했다.”

보로디킨 = 집권 첫 10년 동안 푸틴은 권력의 중앙집중화와 기존 반체제 운동의 주변화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던 중 2011년 모스크바 볼로트나야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인터넷을 통해 조직된 집합적 시위는 크렘린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에 푸틴 정권은 거의 모든 독립적 시민사회단체와 운동에 대한 형사처벌을 시작했다. 그 결과 2020년쯤에는 수감될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평화 시위의 무력함에 대한 좌절감이 뿌리내려서 사람들이 거리 시위를 두려워하거나 기피하게 됐다.

지난해 2월 24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반전시위 참가자를 경찰이 연행하고 있다.    TASS연합뉴스

지난해 2월 24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반전시위 참가자를 경찰이 연행하고 있다. TASS연합뉴스

- 서방의 경제 제재 목적 중 하나는 러시아 국민의 불만을 고조 시켜 푸틴 정권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었는데.

마카로프 = 더 이상 맥도널드가 없다든지, 몇몇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든지 하는 사소한 문제들은 있으나 급격한 일상의 변화는 없다. 러시아인들은 적응하고 또 적응하고 있다. 경제 제재 때문에 러시아인들이 정권에 대항해 봉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보로디킨 = 좋든 나쁘든 러시아인은 견디는 민족이다. 고통에 익숙하다. 몇 군데 가게에서 쇼핑을 못 하게 됐다는 것만으로는 러시아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킬 수 있다. 제재 효과는 느리게 나타나고, 효과가 나타난다고 해서 곧바로 대중의 불만으로 전환되지도 않는다.

- 푸틴 대통령에 대항할 정치 세력은 없나.

마카로프 = 푸틴이 집권하는 동안 반푸틴 세력은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파괴됐다. 푸틴에게 대항할 정치 세력은 없다. 모든 시위가 도덕적 분노의 표시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크라이나는 대규모 시위가 ‘색깔’ 혁명(2004년 오렌지 혁명)으로 이어졌지만 러시아의 시위는 정권이 무너지는 혁명이나 정치적 봉기로 일어나기 어렵다.

- 푸틴 대통령은 언제 전쟁을 멈출까.

마카로프 = 푸틴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전쟁이라는 도박에 ‘올인’하고 있다. 명확한 전쟁 목표도 없기 때문에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다. 모두가 우크라이나가 질 거라고 했지만 우크라이나는 버티고 있다. 지금은 모두가 러시아가 질 거라고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소모전을 지속할 무한한 자원을 갖고 있다. 병사들은 죽든 말든 푸틴은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을 전장에 투입하고 있고 러시아 사회는 이를 참아내고 있다. 러시아인들이 얼마나 더 참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사상자가 좀 더 많아지면 전쟁 반대 목소리가 커질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렇지 않다.

보로디킨 = 푸틴은 대중의 체념과 인내를 착취하고 있다. 그는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다리를 지나쳐버렸다.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앞둔 지난 22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조국 수호자들에게 영광을’이라는 표어로 애국 콘서트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참석했다.   AP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앞둔 지난 22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조국 수호자들에게 영광을’이라는 표어로 애국 콘서트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참석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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